‘붉은 낙엽’으로 9년 만에 연극 복귀
의심으로 무너진 한 집안의 가장 연기
섬세한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비극
![연극 ‘붉은 낙엽’을 통해 9년 만에 무대에 돌아온 배우 김강우 [라이브러리컴퍼니 제공]](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2/14/news-p.v1.20250214.b42e67f5f91541b593bc926ab6d00aba_P1.jpg)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노인의 걸음’이었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듯했다. 찬란한 시간을 보내고, 노을이 찾아오는 어느 시기를 걷고 있는 사람. 조금 구부정하고, 어쩐지 왜소해 보이는 어깨를 한 남자가 천천히 흰 커튼을 걷어낸다. 핏빛의 ‘붉은 낙엽’이 떨어진 마당을 바라보며 그는 ‘그날’을 떠올린다. 연극은 에릭 무어의 대사로 시작한다.
“처음 내가 이 집을 살 때 간절히 원했던 건 단단한 집, 아주 단단하고 바위처럼 튼튼한 집을 짓고 싶었다.”
어떤 바람들은 삶을 지탱하는 동력이자,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 아무리 거센 폭풍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안전한 집처럼 견고하고 아늑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던 그에게 그 날의 ‘사건’은 걷잡을 수 없는 의심, 그로 인한 균열과 붕괴를 불러온다.
김강우는 “첫 독백을 통해 ‘내 말 좀 들어보세요’라고 말하듯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관객에게 시선을 주고, ‘내 감정에 따라와 달라’며 연극의 문을 연다”고 말했다. 관객이 연극 내내 그의 심리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김강우는 미국 작가 토머스쿡의 동명소설 ‘붉은 낙엽’(3월 1일까지·달오름 극장)을 무대로 옮긴 심리 추리극을 통해 9년 만에 무대로 돌아왔다. 연극 ‘햄릿-더 플레이’ 이후다. 오랜만에 서는 무대는 “하프 마라톤을 뛰는 기분”이라며 “4막에 접어들 때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릴 만큼 체력 소모가 크고, 다른 일은 아무것도 못 할 정도로 심리적으로도 지친다”고 말했다.
보통의 연극과 비교해 두 배에 달하는 대사량, 퇴장 한번 없이 이어지는 무대, 쉴 새 없는 장면 전환은 물론 무대와 객석을 휘몰아치는 감정의 파고를 110분 동안 풀어내는 주인공이 바로 김강우가 연기하는 에릭 무어다. 그는 “연습 때마다 산봉우리를 하나씩 넘는 느낌이었다”며 “관객도 무대 위 배우도 기진맥진하게 되는 잔인한 연극”이라고 했다.
![배우 김강우 [라이브러리컴퍼니 제공]](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2/14/news-p.v1.20250214.2986608361b944e7a75f93d6868b8e87_P1.jpg)
‘붉은 낙엽’은 옆집에 사는 여덟 살 여자아이의 실종 사건에 휘말린 가족에게 찾아온 비극을 그린다. 2021년 초연 당시 연극계 주요 상을 휩쓸며 호평을 받았다. 작디작은 의심의 불씨로 인해 무너져 내리는 신뢰의 성은 그 어떤 비극보다 비극적이다. 연극은 에릭 무어가 거대한 사건을 마주하며 겪게 되는 심리변화를 징글징글하게 묘사하며 관객을 괴롭힌다.
“‘의심이 의심을 낳는다’는 것이 제겐 가장 큰 주제였어요. 무대에선 사건이 파도처럼 밀려오니, 작은 의심이 확신으로 넘어가는 단계를 잘게 쪼개 표현하고자 했어요.”
에릭 무어를 만나며 김강우가 더한 그만의 ‘장치’가 있다. “가장 사랑하는 가족을 의심하게 된 결과,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을 더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극초반 분위기를 띄우려 노력한다“고 했다. 무대에서 벌어지는 비극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니지만, 누구든 어떤 아버지든 어떤 상황에서든 자식을 의심할 수 있고, 내게도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오히려 극초반 더 다정하고 평화로운 가정을 그리고자 했어요.”
김강우 역시 중학교 2학년, 초등학교 6학년의 두 아들을 둔 아버지다. 그는 “연습 중 머릿속으론 아이들의 모습이 연결됐다. 사춘기가 되며 점점 예전과는 다른 모습에 ‘내 아이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나’ 싶을 만큼 낯설고 놀라는 순간이 있었다”며 “아이들의 심리 상태를 이 연극을 통해 조금이나마 알게 됐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보면 좋은 연극”이라고 했다.
2002년 영화 ‘해안선’으로 데뷔한 그는 다양한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탄탄한 연기력으로 인정받았다. 인간의 욕망과 광기, 저열한 민낯을 세밀히 그려내는 연기가 그의 강점이다. 어떤 작품이든 간에 김강우는 자신이 맡은 캐릭터를 통해 작품 안에 자연스럽게 스미면서도 강렬하게 각인된다.
![연극 ‘붉은 낙엽’을 통해 9년 만에 무대에 돌아온 배우 김강우 [라이브러리컴퍼니 제공]](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2/14/news-p.v1.20250214.fca219db41db4711864f662818a7bd46_P1.jpg)
그는 스스로를 “타고난 배우가 아닌 생계형 배우”라고 말한다. 그는 또 “(나는) 많은 연습과 고민이 기반이 돼 하나의 캐릭터를 온전히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라며 “연습이 덜 되면 자신감이 떨어져 연기를 할 수 없고, 특히 연극 무대에 더 그렇다”고 했다. 대신 무대에 오르면 ‘혼자만의 주문’을 건다. “설령 건방지더라도 제가 최고라고 생각해요. 커튼이 올라가면 내가 바로 그 캐릭터라고 생각하고 관객과 만나죠.”
온전히 한 작품 안의 ‘누군가’가 됐다는 믿음은 연기의 바탕이 된다. 김강우는 ”내가 얼마나 그것을 믿느냐, 내 앞에 주어진 상황과 그 인물을 얼마나 사실적으로 믿느냐의 싸움이 좋은 연기의 관건”이라며 “순간순간을 믿고 그것을 내 안에 넣으려 한다”고 말했다.
현재 그는 처제인 배우 한혜진과 같은 시기 연극을 하고 있다. 한혜진은 예술의전당에서 ‘바닷마을 다이어리’로 관객과 만나고 있다. 공교롭게도 같은 연출자(이준우), 같은 제작사(라이브러리컴퍼니)의 작품이다. 김강우는 “순전히 우연”이라며 웃었다. 한혜진도 형부의 연극을 관람하고 “정말 재밌게 봤다”며 “너무 힘들겠다”는 소감을 들려줬다고 했다.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한 그는 오랜만에 무대에서 처음 연기를 할 때의 설렘과 다시 마주했다. 그간 무대에서 꾸준히 러브콜이 왔지만 “한 번에 한 작품밖에 못 한다”는 그와 무대의 만남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무대에선 하고 싶은 역할도, 작품도 많다. 셰익스피어 희극 ‘베니스의 상인’ 샤일록도 탐나고, 스웨덴 소설 원작의 영화 ‘오베라는 남자’는 희곡으로 만들어 무대에 올리고 싶다.
“무대에선 늘 시험대에 선다는 느낌이 있어요. 100m 달리기를 하기 직전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가장 행복할 때는 머리 위로 조명이 딱 떨어져 막이 오를 때예요. 그때 매우 많은 생각이 들어요. 아직도 20대 대학 시절 연극을 할 때의 그 느낌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평생하고 싶죠.”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