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파직, 파면, 파산, 퇴출, 이혼….
배구선수 출신 감독 김우진(송강호 분)은 말 그대로 인생에서 ‘패배’ 그랜드슬램을 달성 중이다. 이번엔 해체 직전의 만년 꼴찌 프로 여자배구단 ‘핑크스톰’까지 맡았다. 그렇게 그는 실력도 팀워크도 엉망인 팀과 함께 일어서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번의 1승을 향해 내달린다.
유쾌하게 빠져드는 한국 최초 배구 영화가 출격했다. 4일 개봉한 영화 ‘1승’이다. 김연경·신진식·김세진 등 스타 선수부터 한유미·이숙자 해설위원까지 깜짝 출연해 힘을 실어줬을 정도로 ‘배구계 지원’을 한 몸에 받은 영화다.
장면마다 다소 뻔하게 볼법한 스포츠 영화의 단순한 서사 구조를 비켜가려는 흔적이 엿보인다는 게 이 영화의 재미다. ‘이야기꾼’ 신연식 감독(48)이 남들이 시도 안 한 ‘여자 배구’를 소재로 삼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선 억지스러운 신파를 찾기 어렵다. 코믹하게 풀어낸 인물마다 미세한 감정선이 툭툭 건드려질 뿐이다. 대신 배구가 가진 매력이 더욱 영화적으로 드러난다. 무엇보다 경기 전략이 상세하게 설명될 뿐더러 ‘0.5초’에 목숨 건 배구의 아슬아슬한 긴 랠리를 공의 시점에서 박진감 넘치게 보여주는 연출은 러닝타임 107분인 이 영화의 백미다.
신 감독은 “남자 배구는 힘으로 상대 수비를 뚫어내 점수가 금방 나는 데 반해 여자 배구는 공이 양 팀 코트를 여러 번 오가는 긴 랠리가 나온다”며 “그래서 다양한 (영화 안에서) 시도를 할 수 있다고 봤다”고 설명했다.
각본이 경쾌하니 주연을 맡은 송강호(57)도 그간 보여준 무겁고 진지한 캐릭터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장기를 꺼내들었다. 무려 20여 년 전인 영화 ‘넘버3’(1997), ‘반칙왕’(2000) 등에서 보여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생활 코미디 연기다.
그렇게 능청스러우면서도 인간미 넘치는 송강호의 리듬에 따라 피식피식 웃다 보면 어느새 온기가 스민다. 영화 ‘록키’(1977) 주제곡인 ‘고잉 더 디스턴스’(Going The Distance) 음악 속에 그가 환호하는 장면은 익숙한 언더독 구성에도 그 장면이 더욱 숭고하게 느껴지게 한다. 송강호는 “영화 ‘기생충’(2019) 이후 밝고 환한 영화를 하고 싶었다”며 “이 영화는 제게 ‘박하사탕’ 같다”고 전했다.
영화는 신 감독과 송강호가 뭉친 세 번째 작품이다. ‘거미집’(2023)에선 각본과 배우로, 400억 제작비를 들인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삼식이 삼촌’(2024)에서는 감독과 배우로 호흡을 맞췄다. 다만 그간의 협업 성과가 좋지 않았던 터라 영화 속 줄거리처럼 현실에서도 단 한 번의 승리가 절실한 타이밍이다. “‘남들은 10승, 20승 잘도 하는데 나는 어째 한 번 이기기도 이렇게 힘드냐’라는 대사를 쓰면서 울었다”는 신 감독의 말이 이 영화에 얼마나 큰 진정성을 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신 감독은 “‘1승’은 단순한 스포츠 영화가 아닌, 자신도 모르게 자신감을 잃고 패배의식에 젖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며 “실은 내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내 인생에서 단 한 번, 이 순간만큼은 반드시 쟁취하고 싶다’는 마음을 담았다”고 했다.
최근 몇년간 작품 흥행 부진을 겪고 있는 송강호도 “어떤 구간에는 뭘 해도 잘 되고 사랑받지만, 어떤 때에는 결과가 안 좋을 수 있다. 무엇이 문제라기보다 그런 것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예술가의 기본적인 자세”라며 “도전에는 항상 위험이 내포돼 있다. 긴 인생 살아보니 배우도 마찬가지”라고 전했다.
이는 장난기 가득한 농담을 곁들이며 작품을 소개하는 송강호의 표정에서 이따금 극중 대사가 오버랩 된 순간이기도 하다. “인생은 원래 그렇게 계곡도 있고 능선도 있고 그런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