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문영규 기자]쿠바가 지난 14일(현지시간) ‘테러지원국’이란 오명을 벗긴 했지만 미국과의 국교가 완전히 정상화된 것은 아닙니다. 혁명의 영웅 체 게바라, 쿠바 건국의 아버지 피델 카스트로에 대한 국민적 지지, 50여 년의 국교단절을 단번에 뛰어넘을 수는 없었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과거의 일’이라고 강조했지만 단순히 과거의 일이 아닌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에게 ‘피그스만 침공’(Bay of Pigs Invation)은 잊지못할 일이죠.

[문영규 기자의 세계戰史 엿보기]반백년의 허물, 미국의 쿠바 피그스만 침공-②
피그스만 침공 당시 카스트로의 쿠바혁명군. [사진=게티이미지]

결론적으로 1961년 4월 15일부터 20일까지 있었던 피그스만 침공작전은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남겼습니다. 1400명에 불과한 병력으로 쿠바 국민들의 지지와 정권의 전복을 기대했던 당시 존 F. 케네디 정부의 첫 실패작이었죠.

시계바늘은 다시 1년 전인 1960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마이애미에서 반(反) 카스트로 망명자들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7월부터 과테말라, 플로리다주 우세파섬, 파나마 포트클레이튼 등 모처에서 게릴라 훈련 등을 실시합니다. 쿠바 침공을 위한 일명 ‘2506여단’을 구성하게 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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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지원을 받은 쿠바침공군 2506여단을 물리친 쿠바혁명군. [사진=게티이미지]

1961년 4월 9일, 2506여단은 공격준비를 위해 과테말라에서 니카라과의 푸에르토 카베사스로 이동합니다. CIA는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무기 등 각종 물자들을 공급하죠.

쿠바군은 미군에 비해 보잘것 없었지만 혁명으로 물러난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부가 소유했었던 소련제 T-34, IS-2 전차, SU-100 구축전차, 122㎜ 야포와 이탈리아제 105㎜ 야포를 포함, 더글러스사의 B-26 폭격기, 록히드사의 T-33 전투기 등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체 게바라가 쿠바 서부군을 지휘하고 있었고 혁명전쟁으로 잔뼈가 굵은 여러 지휘관들이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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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그스만 침공 당시 쿠바군 포병대의 흔적. [사진=게티이미지]

쿠바 침공군도 미군 전함과 항공전력의 지원을 받았으나 물자부족 등 여러모로 불리한 조건에서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현지시간 15일 오전 6시, 8대의 B-26 폭격기가 쿠바 공군기지를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침공작전의 서막이 오릅니다. 동시에 이기뇨 ‘니노’ 디아스가 지휘하는 164명의 쿠바 망명자 부대가 오리엔테주 바라코아 상륙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사전 공습 효과는 미미했고 상륙은 실패했습니다. 쿠바는 유엔에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을 즉각 비난하고 나섰고, 케네디 정부는 공격한 이들이 ‘애국적인 쿠바 시민들’이었을 뿐 미국인의 참여는 없었다고 발뺌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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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6여단의 상징. [사진=위키피디아]

다음날인 16일, 디아스 부대의 두 번째 상륙이 실패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7개대대 1400명의 2506여단은 쿠바 남쪽 65㎞ 해상 집결지에 위치해 있었죠. 4척의 배에 나눠타고 접근한 이들은 미 해군 함정 USS 머레이, 월러, 콘웨이, 이튼 등의 호위를 받으며 이동했습니다.

상륙 첫 날인 17일 0시께 2척의 상륙정(LCI)에 나눠타고 피그스만 상륙에 돌입한 2506여단은 오전 6시 반부터 쿠바 공군의 공격을 받습니다. 270명이 상륙했지만 이들 중 180명 가량은 무기와 장비를 찾지 못해 싸움에 가담할 수조차 없는 상태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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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그스만 침공사건 40년이 지난 2001년 호세 라몬 페르난데스 쿠바 부통령이 피그스만을 찾아 당시 숨졌던 병사들을 추모하는 기념비에 새겨진 이름을 가리키고 있다. [사진=게티이미지]

오전 7시 반, 5대의 C-46, C-54 수송기를 이용해 강습작전을 벌였던 177명의 2506부대원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대다수가 장비를 잃어버려 해안으로 가는 도로 차단도 실패했습니다.

이날 오후 카스트로는 직접 전투 현장을 방문했고, 반카스트로 지도자였던 오스발도 하미레스가 체포돼 즉결처형당하면서 전세는 하루만에 기울었습니다.

침공군은 18일 6대의 B-26을 이용해 공습을 가하며 반격에 나섭니다. 쿠바군은 병력 수송차량과 장비들이 폭탄, 네이팜탄 공격을 받으며 큰 피해를 받습니다. 이 B-26에 탑승한 사람들은 CIA와 계약한 2명의 조종사들을 비롯해 2506여단 공군 소속 4명의 조종사들과 6명의 항법사들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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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지원을 받아 피그스만 침공작전에 참가했던 알프레도 듀란이 사건 40주년을 맞은 2001년 피그스만을 방문해 기자들에게 당시 상황들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게티이미지]

19일 히론 공항을 접수한 2506여단 대원들에게 장비와 물자가 보급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항공지원도 없고 탄약마저 부족해져 철수를 결정합니다. 오후 늦게 USS 이튼과 머레이가 이들의 철수를 돕기위해 코치노스만으로 이동하죠.

D+3일인 20일 철수가 시작됐지만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22일까지 미 해군이 구조한 2506여단 생존자들은 24~30명에 불과했죠.

2506여단의 전사자는 114명, 포로로 잡힌 이들은 1200명이 넘었습니다. 공군은 쿠바 망명자 10명을 포함, 4명의 미국인들도 작전 중 사망했습니다. 1962년 쿠바는 미국으로부터 5300만달러를 받고 1113명의 포로들을 송환하죠.

쿠바 측 피해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176명이 전사했고 500~4000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15일 공습에선 7명이 사망했고 53명이 다쳤죠.

미국은 여러차례 개입 사실을 부인했으나 1990년대 CIA가 미국인 사망자들에 대한 훈장수여를 결정하면서 사실상 개입을 인정한 셈이 됐습니다.

작전 실패에 대한 책임은 CIA에게 돌아갔습니다. 그해 11월 CIA는 내부 감찰 보고서에서 게릴라 지원에서 군사행동으로 작전을 변경한 점, 쿠바 망명 지도자들이 작전에 적절히 참여하지 못한 점, 쿠바군에 대한 정보 수집 실패, 쿠바 내부 저항세력 조직화 실패,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CIA 요원들의 부족, 긴급계획 부족 등을 작전 실패의 원인으로 들기도 했죠.

결국 1962년 앨런 덜레스 CIA 국장을 비롯, 찰스 케이벨 부국장, 작전을 입안한 리처드 비셀 부국장 등이 사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반면 쿠바는 피그스만 침공과 동시에 사회주의 국가를 선언했고 소련과 손을 잡으면서 미국과의 반백년 적대관계를 유지합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말처럼 이제 그 과거를 기억하는 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대신 국교정상화로 명품 쿠바산 시가담배 수입을 기대하는 이들이 늘어났을 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