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OC=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 5시가 조금 넘은 새벽, 가트로 나간다. 해뜨기 전이라 어두운데도 이미 많은 사람이 나와 있다. 어제 만나기로 약속한 람 할아버지를 기다리면서 사람들과 풍경을 관찰하는 게 재미있다. 여행자들은 일출을 보러 이 새벽에 나와 있다. 뱃사공들은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려 준비하는 중이다. 벌써 신성한 갠지즈에 목욕하러 나온 사람들도 있다. 밤의 어수선함과는 사뭇 다른 고요함도 감돈다. 사공 할아버지를 기다리면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머리를 깎은 젊은이가 뿌자바바와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말끔한 차림의 그는 이야기를 나눈 후 옷을 벗고 강에 들어갔다가 나온다.
일련의 절차를 거치고 옷을 다시 입고 의식을 행한다. 그는 상주였다. 저 북쪽 가트에 아버지를 화장시키러 온 것이다. 여행자의 얕은 호기심은 금세 미안함으로 변한다. 여기는 바라나시다. 삶의 활기가 가득한 이 도시에서 죽음을 알아차리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배에 타야할 6시가 가까워오면서 다른 뱃사공들이 호객을 해왔다. 어제 람할아버지는 백루피면 된다고 했는데 오늘 아침 이 사람들은 400루피를 부른다. 즉석에서 흥정을 한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100루피는 말도 안된다며 코웃음을 친다. 릭샤왈라들의 그것처럼 뱃사공들도 담합하고 있다. 탈 배는 하나인데 흥정하는 사공은 여러 명 이어서 정신이 없다. 고요한 마음에 짜증이 일어나면서 정신이 퍼뜩 든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도시지만 돈 앞에선 치열한 삶뿐이다. 다른 사람들과 흥정하던 일본인 여행자들과 함께 배를 타기로 하고 일인당 300백루피에 낙찰을 본다. 100루피를 깎았지만 이게 싸게 타는 금액인지도 잘 모르겠다. 한바탕의 소란이 끝나고 배를 탄다. 이제껏 흥정하느라 흥분하던 사공은 이제 말이 없다. 고요함만이 강위에 흐른다. 해가 뜨기 전까지 강의 이곳저곳 둘러 본다. 배는 북쪽 마니까르니까(Manikarnika) 가트에 근접한다. 하얀 연기와 시커먼 건물지붕이 대조를 이룬다. 여기가 바로 화장하는 곳이다. 저 연기들이 시신을 화장하는 연기들이다. 밤이나 낮이나 시신을 태운다. 누구든 이곳에서는 죽음을 의식하게 된다. 삶이라는 단어와 죽음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힌두교에서는 바라나시에서 죽어서 화장을 하고 갠지즈에 뿌려지는 것이 구원을 받아 환생하는 길이라고 한다. 이 곳 가트에는 연기가 꺼지는 적이 없다. 금방 뱃사공들과 돈 때문에 한판 실랑이를 하고 왔는데 여기는 죽은 자의 몸을 태워 강으로 보내는 장소다. 영혼이 구원받는 곳이다.
일출을 보러 나와서 화장터를 먼저 본다. 마음이 숙연해진다. 태양은 매일 떠오른다. 여기 화장터의 불꽃은 사그라진 날이 없다고 한다. 태어나고 살아가고 늙고 죽는 일은 어디든 매일 일어난다. 차이가 있다면 한국에서의 나는 보이지 않는 생로병사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고 바쁘게 떠밀려 가기만 했고 바라나시에서는 그것들이 갑자기 눈앞에 실체로 펼쳐져 있다는 점이다. 배는 강 동쪽 건너편에도 잠시 정박한다. 배 하나를 빌린 가족이 성스런 목욕 중이다. 남자들은 옷을 다 벗고 여자들은 옷을 입은 채로 성수에 몸을 담근다. 추위를 무릅쓰고 성수에 들어가 영혼을 정화하는 것, 생생하게 살아있음은 이런 거다. 가족의 안녕과 무사함을 빌고 죄 사함을 받는데 추위가 무슨 걱정이 될 수 있을까? 아예 수영을 하는 사람도 있다. 죽은 자의 뼛가루가 뿌려지는 신성한 강물에 산 사람은 몸을 담근다. 추위에도 아랑곳 없이 활짝 웃는 얼굴이 보기 좋다.
해가 떠오른다. 처음 인도에 와서 갠지즈의 일출을 봤을 때는 벅찬 마음이 들었는데, 지금은 담담하게 해를 마주하고 있다. 6년 전의 여행에서 이미 봤던 광경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지금 평온한 이 마음은 세월의 선물인 것 같다. 6년만큼의 나이테가 내게도 생겼을 것이다. 해는 지구상의 어디든 떠오른다. 다만 내 일상에서의 태양이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했던 것뿐이다. 해와 달과 별을 바라볼 수 있는 일상이야말로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 배에서 내린 후 숙소에 들렀다 다시 나온다. 숙소가 가까우니 좋다. 이제는 식사를 할 시간이다. 관광객을 위한 식당이 아닌 현지인들이 가는 식당에 들어가 그들이 먹는 대로 아침을 먹는다. 입맛에 그럭저럭 맞는 여행자 식당 메뉴는 백루피 내외의 가격인데 비해 여기는 25루피다. 싸고 조촐한 음식이지만 아침으로 손색없는 한 끼가 된다. 식사를 하고 가트 바깥쪽 길을 둘러본다. 매일 채소와 과일 장이 선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과일을 예쁘게 쌓고 장사준비를 시작한다. 늘어놓은 모든 것을 다 팔아도 얼마 되지 않을 것 같은 작은 좌판의 주인 할아버지에게도 손님들이 있다. 소소한 일상이 깨어나고 있는 아침이다. 다시 가트로 나가 본다. 해가 뜨면서 추위가 사라졌다. 가트에는 여전히 사람이 많다. 아침이나 밤에 보트를 타면 사람들이 디아(꽃불)를 띄운다. 해가 중천으로 떠오르자 아주머니는 디아가 담긴 바구니를 뒤에 놓고 앉아있다. 아침 장사가 끝났으니 저녁 장사를 준비하시는 건지 편한 얼굴로 카메라를 쳐다본다. 사두로 보이는 하얀 수염의 할아버지가 가트 계단에 빨래를 말리기도 한다 . 바쁠 것 없이 다들 느긋한 얼굴이다. 골목길을 따라 걷는 일은 어제도 오늘도 재미있다. 호객하는 사람들이나 빤히 쳐다보는 까만 눈동자들도 즐기며 걷는다. 지금 바라나시에 있는 것이 당연한 듯 편하게 느껴지는 나른한 시간들이 내 것이다. 방향은 북쪽으로 잡았지만 무엇에 취한 사람처럼 미로같은 골목을 헤맨다. “람 람 사뜨 헤! 람 람 사뜨 헤!” 합창소리에 뒤를 돌아본다. 뭔가를 들고 노래를 부르며 장단을 맞추어 빠르게 걷는 사람들이 오고 있다. 기다란 널판에 반짝이는 주황색 천을 씌운 무엇을 여러 사람이 어깨에 메고 맨발로 간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골목이라 잠시 서서 행렬을 먼저 보낸다. 사람들이 내 옆을 지나가고 그 주황색 천을 덮은 널빤지가 바로 눈앞에서 사라진다. ‘람 람 사뜨 헤’는 ‘신의 이름은 진리다’라는 뜻으로 시신을 옮길 때 합창하는 말이라고 한다. 그것은 운구행렬이다. 시신을 천으로 덮어 널빤지 위에 올려 매고 화장터인 마니까르니까 가트로 가는 것이다. 한 사람의 주검이 내 옆을 지나가고 있다. 삶을 마감하고 이젠 필요 없는 육체를 화장해서 갠지즈에 뿌리고 영혼을 구원하러 온 어떤 사람의 일생이 스친다. ‘삶을 마감한다.’는 말이나 ‘영혼을 구원한다.’는 말을 쓰면서도 그 문장의 무게가 가슴에 내려앉는다. 가트의 화장터에 도착했다. 단백질이 타는 야릇한 냄새와 흰 연기가 끊이지 않는다. 일순간 심난해지고 숙연해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저쪽에서 바라보던 노인이 다가온다. 허름한 노인의 말은 딱 설명을 할 만큼만 숙련된 영어였다. 대대로 그곳을 지키는 카스트라고 자신을 설명하며 원하면 이곳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한다. 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그의 이야기는 대충 이랬다. “시신 한 구를 화장하는 데 한 시간 걸린다. 많게는 200구의 시신들이 화장되기 위해 이곳으로 매일 온다.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부인이 죽으면 남편이 머리를 깎고 상주가 된다. 수천 년 간 꺼지지 않고 타오른 불꽃의 불씨를 상주가 가져다 장작위에 불을 붙이면 화장이 시작된다. 화장하는 동안 유족들은 울지 않는다.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나중에 화장이 끝나고 집에서 사람들이 모였을 때 소리 내어 운다.” 설명을 마치자 노인은 자신이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는 곳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들이 넉넉한 목재를 살 돈을 자신에게 기부하라고 한다. 100루피를 주고 뒤돌아서는데, 노인은 빅머니를 더 달라며 아예 옷깃을 잡아당길 태세다. 혼미하던 정신이 제자리로 돌아온다. 여기는 인도다. 그제야 손사래를 치며 그곳을 빠져 나온다. 골목을 빠져나와 다시 가트로 온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여기는 다시 삶의 현장이다. 악세사리를 파는 노점 옆에 앉아 ‘강가’라고 그들이 부르는 갠지즈를 바라본다. 가트에서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고, 이번에는 강변의 가트를 걸어 다시 화장터로 향한다. 아까 내려다보던 화장터가 아니라 지금은 아침에 배에서 보던 방향으로 간다. 타는 냄새를 동반한 연기는 여전하다. 아까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 봤고 지금은 화장하는 곳으로 좀 더 가까이 왔다. 가족이 아니면 더 이상 접근하지 말라는 곳까지 간다. 유족들이 숙연히 서서 화장되는 장면을 쳐다본다.
주황색 천을 덮은 시신이 장작위에서 타고 있다. 화장되어 갠지즈에 뿌려짐으로 영혼이 구원을 받고 윤회를 벗어나는 축복을 받는다 해도 가족들은 슬플 것이다. 울어서는 안 되는 유족들이 슬픔을 참아내며 묵묵히 지켜본다. 한 사람이 죽고 남은 사람들은 의식을 치르고 있다. 자욱한 연기는 끊임없이 피어오른다. 단백질 타는 냄새가 난다. 연기 사이로 소들이 앉아서 하품을 한다. 개들도 어슬렁거린다. 한국에서는 고기를 구우면 사람이 옆에 앉아있는데 여기 바라나시에서는 사람이 장작위에서 불타고 있고 소와 개가 그 장면을 쳐다보고 있다. 아무래도 생각이 많아진다. 이 풍경이 바라나시를 잊지 못하게 할 것 같다.
현대 사회에서 죽음은 이면에 존재한다. 나와 직접 연관되지 않는다면 죽음을 그토록 가까이에서 접할 기회가 없다. 그래서 여기 바라나시는 충격적이다. 골목에서 수차례 마주치는 운구행렬, 쉴 새 없이 타는 장작위의 시신, 그 냄새와 연기들이 여과 없이 폐로 스며들기 때문이다. 죽음을 숨겨둔 세상에서 온 사람들은 바라나시에서 길을 잃는다. 남의 죽음은 자연의 현상인 듯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나의 죽음은 두렵다. 삶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는 것을 느닷없이 인식하게 되는 것은 난처한 경험이다.그렇게 당황하면서도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죽음이란 단어가 머릿속에 자리잡아 현재의 삶을 헤아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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