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말, 신생 거래소 하나가 전세계 파생상품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주인공은 독일거래소 그룹 산하의 유렉스(Eurex)이다. 유렉스는 1997년 9월 독일상품거래소(DTB)와 스위스옵션·금융선물거래소(SOFFEX)가 합작회사를 만들기로 합의하여 이듬해 문을 연 파생전문 거래소다. 전신인 독일상품거래소는 1990년 런던에서 주로 거래되는 독일 채권상품을 빼앗아오기 위해 세워졌으나 그간 거래 실적은 미미했다. 또 스위스측 거래소는 이제 막 출범한 전자거래 플랫폼이었다. 그동안 주목을 받지 했던 거래소가 합병과 동시에 거래량을 폭발적으로 늘려 1-2년만에 세계 1위의 자리를 차지하는 기적을 일궈낸 것이다.
세계를 놀라게 한 유렉스의 역동성.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유럽에는 1999년 1월 통화 통합을 앞두고 유럽연합 내 거래소간 합병 논의는 있었지만 그 진행은 지지부진했다. 이런 와중에 독일거래소가 과감한 승부수를 던졌다. 그것도 역내가 아닌, 유럽연합 가맹국인 독일과 역외 국가인 스위스의 거래소간 전격적인 통합을 발표한 것이다.
합병의 키워드는 ‘시장과 고객중심의 서비스’였다. 그동안 거래소는 회원사인 증권사들이 모여 증권매매를 중개하는 장소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있었다. 회원사의 이해관계에 좌우되어 거래소는 고객들의 수요는 도외시했다. 시장에 파생금융, 전자매매 시스템 등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가 나왔지만, 거래소에는 주식·채권·선물 등 업권별, 지역·통화별로 각종 칸막이가 존재해 왔던 것이다.
유렉스는 수요자의 편의를 위해 업종, 지역, 심지어 다른 통화로도 모든 거래가 한 곳에서 이뤄지도록 만들었다. 원격지 회원제를 도입해 파리, 런던, 뉴욕의 고객들이 어느 곳에서든 직접 매매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또 유럽연합의 일원인 독일과 스위스 거래소간의 합병이라는 장점을 살리기 위해 어느 통화로도 매매·결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비하고 외국인 직원도 대량 충원했다.
또 유렉스는 스위스 거래소가 갖고 있던 전산거래의 편의성을 살려 매매에서 정보제공, 청산결제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한 시스템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이어 유렉스는 거래소 지배구조를 회원제가 아닌 주식회사제로 만들고 주식을 상장시켰다. 철저한 ‘이윤추구형’ 조직으로 변모시킨 것이다. 여세를 몰아 유렉스는 장외상품 청산소를 만들고, 유럽 채권과 레포, ETF 시장을 연이어 덧붙여 갔다.
파죽지세로 시장을 넓혀나간 유렉스는 주가지수 상품과 채권분야에서 단기간내 세계 수위 자리를 차지했다. 거래량은 1999년 3억8천만건을 넘어 미국 거래소들을 뛰어 넘었고 2003년에는 10억건을 돌파했다.
경영학자의 통설은 성숙한 시장에서의 1위 점유율이 뒤바뀌는 경우는 혁신적 신상품을 출시했을 때만 가능하다고 보아왔다. 그런데 유렉스가 이런 통설을 깨어버렸다. 주가지수, 채권 선물 등 기존 상품만 갖고도 바로 시장과 고객 친화적인 서비스혁신으로 세계 1위의 기적을 이뤄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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