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홍성원 기자]오는 5월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제2차 세계대전 승전 70주년 기념행사(전승절)에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해야 한다는 러시아 쪽 요청이 거세지고 있다. 러시아 국제문제 전문가들이 한ㆍ러 관계 발전을 위해 박 대통령의 러시아행(行)을 압박하는 모양새를 띄고 있고, 러시아 정부는 지난 8일 한ㆍ러 외교장관 회담에서 이를 공식 요청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청와대와 정부의 고민은 깊어만 간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이 행사 참석이 굳어진 걸로 알려지면서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선 박 대통령이 참석하는 게 낫지 않냐는 의견이 있어서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사태로 러시아와 각을 세우고 있는 미국 측이 박 대통령의 전승절 참석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는 점은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크렘린궁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는 러시아 전략연구소와 국민대 유라시아 연구소가 11일(현지시간) 모스크바에서 공동주최한 ‘한ㆍ러 관계와 양국 협력 전망’ 세미나에선 러시아 전문가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전승절 참석이 한국 외교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 문제로 긴장 국면을 이어가고 있는 미ㆍ러 관계에 끼인 한국에 선택을 강요하는 분위기까지 감지됐다.
러시아 전략연구소 소장 레오니트 레셰트니코프는 “러시아는 박 대통령의 5월 방러를 기대하고 있으며 이 방문이 성사되면 양국 관계가 한층 더 강화될 것”이라며 “중요한 것은 양국 관계 발전을 저해하려는 미국 등의 세력이 우리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은 동북아 지역과 국제무대에서 스스로의 정치ㆍ지정학적 지위를 제대로 못 느낄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아주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면서 “박 대통령의 방러는 이 분야에서 한국의 독자적 행동 주체로서의 지위를 한층 강화시켜줄 것”이라고 설명했다.
레셰트니코프는 소장은 아울러 “만일 불참한다면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서방 제재에 한국이 동참하지 않음으로써 고조된 두 나라 사이의 우호적 분위기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같은 연구소의 뱌체슬라프 홀로트코프 경제연구센터 팀장도 “미국이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 러시아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는 정책을 펴고있는 현 상황에서 박 대통령의 승전 기념행사 참석 여부가 한국 대외정책의 독립성과 독자성, 미국으로부터의 독립성의 수준을 보여주는 잣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세미나에선 군사ㆍ외교적으로 민감한 문제인 고(高)고도 미사일 방어 시스템인 ‘사드(THAAD)’까지 거론하며 한국이 미ㆍ러 중 어딜 선택할 건지 결정하라고 압박하는 인사도 있었다.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산하 극동연구소의 알렉산드르 제빈 한국학센터 소장은 “한국이 미국의 외교적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다”며 “박 대통령이 러시아에 오지 않고 미국의 고(高)고도 미사일방어 시스템 ‘사드(THAAD)’가 한국에 배치될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한국을 향한 러시아의 이런 구애를 지켜보는 미국의 시선은 차갑다. 백악관은 지난 10일 박 대통령의 방러에 부정적인 태도를 즉각적으로 밝힌 바 있다. 박 대통령이 러시아에서 북한 김정은 위원장과 만나는 장면이 연출되는 게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적절한지를 놓고도 정치권과 정부내에선 의견이 엇갈리는 걸로 알려졌다.
청와대는 박 대통령의 전승절 참석에 대해 여전히 결정된 바 없다는 입장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5월 일정은 아직 확정된 게 없고, 여러 일정들이 경합하는 상황에서 검토할 내용이라는 최근의 입장에서 변한 건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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