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때 처음 기타잡고 작곡…가요제 출전해 TV에 나올때 아버지는 저인줄 모르셨어요. 음악활동 반대가 워낙 심했었죠.
1983년 솔로 1집은 사실상 ‘고별앨범’으로 제작, 그런데 뜻하지 않게 ‘못다 핀 꽃 한 송이’ ‘정녕 그대를’ 등 빅히트…대중가수 삶을 시작한 계기로
기타를 치면서도 정작 우리소리에 아는 게 없어 부끄러웠죠. 그래서 故박동진·안숙선 선생님·김덕수 형님을 찾아다니며 배웠죠.
아시안게임·올림픽 전야제, 2002 월드컵 조추첨·개막식, 2010 G20 영상 음악 제가 만들었죠. 대중이 우리소리로 향하는 징검다리 되고 싶어요.
대중가수·로커·국악인…김수철의 세얼굴 우리에게 10여년동안 잊혀졌던 ‘작은 거인’ 24일부터 6년만에 단독 콘서트로 귀환 오랜 침묵을 깨고 돌아온 그를 만나다
세상엔 잘 알고 있다고 여겨왔기 때문에 오히려 제대로 실체를 모르고 지나쳐 버리는 것들이 적지 않다. 싱어송라이터 김수철은 데뷔 후 36년간 대중에게 늘 ‘등잔 밑 어둠’ 같은 존재였다.
김수철에 대한 세간의 기억은 커다란 뿔테 안경을 낀 얼굴에 기타를 메고 구부정하게 서 있는 어리숙한 모습의 키 작은 사내로 수렴한다. 김수철과 80년대를 공유하는 나이 지긋한 이들 대부분은 그를 ‘못다 핀 꽃 한 송이’ ‘나도야 간다’ ‘젊은 그대’ 등 왕년의 히트곡을 부른 가수로 추억하고 있다.
그보다 젊은이들은 그를 만화영화 ‘날아라 슈퍼보드’의 주제가 ‘치키치키 차카차카’를 부른 주인공으로 기억한다. 영화에 관심을 가진 누군가는 김수철이 연기한 ‘고래사냥’의 소심한 대학생 ‘병태’와 ‘금홍아 금홍아’의 꼽추화가 ‘구본홍’의 모습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음악을 조금 안다고 자부하는 일부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무대 위를 방방 뛰어다니다가 들려주는 그의 예사롭지 않은 기타 연주와 싱어송라이터로서의 능력에 주목했다.
김수철의 음악적 시발점이었던 록밴드의 이름 ‘작은거인’은 보기와는 다르게 범상치 않은 음악적 역량을 과시하는 그를 대표하는 고유명사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작은거인’이란 고유명사로 김수철을 설명하기엔 ‘등잔 밑 어둠’은 짙고 넓다.
김수철은 세 가지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대중가수’라는 익숙한 얼굴과 ‘로커’라는 의외의 얼굴, 그리고 ‘국악인’이라는 낯선 얼굴이 바로 그것이다.
‘대중가수’ 김수철의 얼굴에 익숙한 많은 사람들은 그의 방대한 음악적 수비범위를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김수철이 평생 동안 내놓은 40장에 가까운 디스코그래피 중 가요 음반은 불과 10장 남짓이다. 나머지 음반에 대한 대중의 기억은 희미하고 행방 또한 묘연하다.
한때 ‘가수왕’에 오르는 등 조용필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린 성공한 ‘대중가수’였던 김수철이 무대에서 받은 스포트라이트는 고스란히 ‘로커’와 ‘국악인’이란 나머지 두 얼굴을 덮는 그림자로 반작용했다. 2000년대에 접어들어서도 김수철은 내부적으로 끊임없이 창작 활동에 매달리고, 외부적으로 종종 텔레비전 음악 프로그램과 공연을 통해 모습을 비췄다. 하지만 새로운 음반 발매가 10년 이상 이뤄지지 않음에 따라 그의 ‘대중가수’라는 익숙한 얼굴도 점점 낯설어져만 갔다.
그랬던 김수철이 다시 기지개를 켠다. ‘여기 우리 음악이 있다’ 페스티벌이 지난 3일 시작해 오는 27일까지 서울 남산 국립극장에서 매주 새로운 주제로 열린다. 김수철은 오는 24일 국립극장 내 KB국민은행청소년하늘극장에서 ‘거장의 재발견’이라는 타이틀로 6년 만에 단독 콘서트를 벌인다.
이날 무대에서 김수철은 자신이 창시하고 평생 동안 개척한 ‘기타 산조’를 사물놀이패와 함께 대중 앞에서 라이브로 첫 선을 보일 예정이다. 콘서트를 앞둔 김수철을 만나 그의 지난 음악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로커’ㆍ‘대중가수’ 김수철
지난 2007년 한 일간지 선정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 28위에 1981년 작 작은거인 2집이 이름을 올렸다. ‘새야’ ‘어둠 속에서’ 등의 곡이 실린 이 음반은 당시로서는 실험적인 하드록과 기타 연주로 한국 록음악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음반의 모든 곡과 연주를 빚어낸 주인공은 ‘로커’ 김수철이었다.
“저는 15세 때 처음 기타를 잡고 작곡을 시작했습니다. 그저 기타를 연주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통기타만 연주하는 것이 심심해서 전기기타를 잡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곡들을 따라 연습했죠. 제임스 갱(James Gang), 딥 퍼플(Deep Purple)의 곡들을 많이 연주했는데 주변에서 잘한다고 칭찬을 해주니 더욱 열심히 연습에 매달렸습니다. 부모님께선 그런 제 모습을 싫어하셔서 저는 밤엔 이불 속에 들어가 연습을 하거나 친구의 집을 전전하곤 했죠.”
광운대 공대에 진학한 김수철은 밴드를 만들며 본격적으로 록음악에 빠져들었다. ‘퀘스천’이란 4인조 밴드로 1977년 TBC 연포가요제에 출전했던 김수철은 이듬해 작은거인을 결성, 전국 대학축제 경연대회에 출전해 ‘일곱 색깔 무지개’로 그룹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다. 이어 1979년 데뷔 앨범을 발매한 작은거인은 1981년 2집으로 탁월한 음악성까지 인정받았다. 그러나 작은거인은 멤버들의 군 입대와 유학 등 진로문제로 곧 해체를 맞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니 먹고 살 길이 막막하더군요. 아버지의 음악활동 반대도 여전히 심했습니다. 제가 가요제에 출전해 텔레비전에 등장했을 때도 아버지는 그게 저인 줄 모르셨을 정도로 저는 제 음악활동을 집에서 숨겨야 했었죠. 1983년에 발매한 솔로 1집은 사실상 ‘고별음반’의 성격으로 제작된 것입니다.”
‘고별음반’은 뜻하지 않게 ‘대중가수’ 김수철의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못다 핀 꽃 한 송이’ ‘정녕 그대를’ ‘내일’ 등 앨범 수록곡 대부분이 요즘 말로 ‘음원 줄 세우기’에 가까운 히트를 기록한 것이다. 1984년 솔로 2집에서도 ‘왜 모르시나’ ‘젊은 그대’ ‘나도야 간다’ 등 히트곡이 쏟아져 나왔다. 각 방송국의 연말 가수상을 휩쓴 김수철은 영화 ‘고래사냥’에 출연해 백상예술대상 신인상까지 거머쥐며 당대 최고의 스타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솔로 음반에서도 음악적 실험은 계속됐다. ‘못 다핀 꽃 한 송이’의 스트링(현악) 편곡은 당대 최고 수준의 세련미와 구성을 자랑한다. 10분여의 파격적인 길이로 솔로 1집 LP B면의 절반을 채우는 ‘별리(연주곡)’은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의 초창기 사이키델릭한 작품들을 연상케 하는 전위적인 작품이다. 솔로 2집 수록곡 ‘완성의 꿈’은 14분여에 달하는 대곡으로 철학적인 내용을 담은 내레이션과 웅장한 신서사이저 사운드를 통해 실험적인 음악의 극치를 들려준다.
“저는 제프 벡(Jeff Beck)과 데이비드 길모어(David Gilmour)처럼 기타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는 연주자들을 좋아합니다. 그들의 연주와 음악은 기교가 아닌 정신으로부터 우러나옵니다. 솔로 가수로 활동하며 인기를 누리면서도 제가 하고 싶은 음악만큼은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음반에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숨 가쁜 방송 활동이 제겐 잘 맞지 않았었죠.”
‘국악인’ 김수철 지난 1997년 국립국악원은 ‘한국음악 창작곡 작품목록집’을 펴냈다. 이 책엔 1941년부터 1995년까지 발표된 국악 창작곡들이 집대성돼 있는데, 이 중 김수철의 작품은 무려 20곡에 달한다. 김수철은 2006년부터 2009년까지 국립국악원의 자문위원을 맡기도 했다. 이는 국악계가 김수철을 ‘국악인’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무언의 증거들이다.
“우리소리(김수철은 인터뷰 내내 국악을 우리소리라고 불렀다)와는 음악 활동 시작과 동시에 인연을 맺었습니다. 1980년 친구 김종원(CF 감독), 송승환(배우ㆍPMC네트웍스 대표), 진유영(배우ㆍ영화감독)과 16㎜ 소형 영화 ‘탈’을 제작해 프랑스 청소년영화제에 출품한 것이 계기였죠. 영화로 한국적인 내용을 말하고, 기타로 한국적인 선율을 연주하면서도 정작 우리소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부끄럽더군요. 그때부터 몇 년 동안 꾸준히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우리소리를 배웠습니다. 대중가수가 왜 엉뚱한 곳에 기웃거리냐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더욱 열심히 공부했죠. 안숙선 선생님, 김덕수 형님 과 함께 협연을 벌이기도 했고요. 그렇게 10년 쯤 노력하니 고(故) 박동진 선생님께서 “그동안 유심히 지켜봐왔는데 이제 너를 인정한다”고 격려를 해주시더군요. 그땐 정말 눈물이 나도록 기뻤습니다.”
가요계에서 한 발짝 비켜선 그는 영화음악과 드라마 음악을 통해 국악의 현대화에 나섰다. 이러한 김수철의 노력은 그를 주요 국제 행사의 단골 음악 감독으로 만들었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전야제 음악, 1993년 대전 엑스포 개막식 음악, 2002년 한ㆍ일 월드컵 조추첨ㆍ개막식 음악, 2010년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영상 음악들이 모두 김수철의 작품이다. 그는 지난 2002년 미국 뉴욕 유엔(UN)본부 총회의장에서 제57주년기념 UN의 날 특별공연으로 ‘기타산조’를 연주하기도 했다. 또한 김수철은 지난 1989년 대중가요 작곡가 최초로 제11회 대한민국무용제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순수음악계에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저는 영화와 드라마 음악에 참여하면서 우리소리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영화 ‘고래사냥’에 피리 연주곡을 삽입했는데, 그 곡이 KBS 대하드라마 ‘노다지’ 음악 작곡의 인연으로 이어졌습니다. ‘노다지’를 위해 아쟁 연주곡을 작곡했는데, 그 곡을 들은 아시안게임 주최 측이 저를 찾아와 전야제 음악을 의뢰했죠. 서울올림픽 전야제 음악, 대전엑스포 개막식 음악, 한일 월드컵 조추첨ㆍ개막식 음악 모두 같은 경로를 통해 섭외가 이뤄졌습니다. 제가 가수 김수철과 동명이인인 줄 알고 찾아왔다가 놀란 사람들도 많습니다. 우리소리를 하는 김수철이 가수 김수철인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죠. 우리소리의 현대화를 위한 노력이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국제행사 음악 감독을 맡는 일은 보람된 일입니다.”
음악적 성취와는 별개로 김수철 국악 음반의 판매고는 신통치 않았다. 1987년 대한민국 무용제 음악으로 사용된 곡들을 모아 발표한 ‘영의 세계’, 1989년 ‘황천길’과 ‘불림소리’까지 줄줄이 시장에서 쓴맛을 봤다. 1993년 영화 ‘서편제’ OST만이 유일하게 상업적인 성공을 거뒀다. 영화의 흥행과 더불어 이 음반은 무려 70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는 대기록을 남겼다.
“올해가 ‘서편제’ 개봉 20주년입니다. 당시 ‘서편제’ OST를 통해 많은 사람이 우리소리와 가까워졌던 모습은 참으로 보람된 기억입니다. 그러나 ‘서편제’ 이후 이러한 흐름이 끊어진 것은 아쉽습니다. ‘서편제’ 개봉 20주년을 맞은 만큼 우리소리의 대중화를 위해 영화에 대한 재조명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김수철이 바라는 ‘우리소리’의 미래 최근 김수철은 대학 교수들을 대상으로 ‘김수철의 우리소리 이해하기’라는 특강을 벌이고 있다. 지난 2010년 서울대 법대 교수들의 요청으로 시작된 이 특강은 수강자들의 호평을 받으며 국민대와 연세대 교수, 서울대병원 의사 등 대상을 확장해 펼쳐지고 있다.
“동서양의 소리를 비교해 설명하고 제가 작곡한 곡을 들려주는 형태로 특강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수강자들이 교육자인 만큼 우리소리에 대한 이해가 빠르고 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파급효과도 큽니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우리소리를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육자들에게 우리소리를 알리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입니다.”
김수철은 전통 문화의 저변과 국악 전공자들의 열악한 현실을 지적하며 기업의 꾸준한 관심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지난해 히트상품 중 우리 전통 문화와 관련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통하는 우리만의 문화콘텐츠가 없다는 사실은 무척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는 오랜 세월 우리소리의 대중화를 위해 힘써왔지만 개인적인 노력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뜻있는 기업의 관심이 중요합니다. 기업의 전통문화 저변 확대를 위한 꾸준한 후원은 열악한 경제적 상황에 놓인 국악 전공자들의 일자리 창출과 나아가 기업의 이미지 제고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는 현 정부의 핵심 국정기조인 창조경제에도 부합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김수철은 “앞으로 대중이 우리소리로 향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맡고 싶다”고 소망을 전하며 “이번 ‘거장의 재발견’ 콘서트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재미있는 공연이 될 테니 많은 응원을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
정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