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화미술관, 9월 29일까지

로젠퀴스트 회고전 ‘유니버스’

동료 죽음에 전업작가로 전환

미국적 삶...환경·정치로 확장

美 팝아트 거장이 보여주고 싶은 시대 부조리
작가 제임스 로젠퀴스트의 생전 모습
美 팝아트 거장이 보여주고 싶은 시대 부조리
서울 종로구 세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로젠퀴스트 회고전 ‘유니버스’ [세화미술관 제공]

미국 뉴욕 맨해튼과 브루클린에서 옥외 광고판을 그리던 화가는 27살이 되던 해, 전업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작업 중에 사다리에서 떨어져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동료의 생이 그의 발걸음을 옮기게 했다. 그는 패션 잡지나 신문 광고에서 발췌한 친숙한 이미지를 재조합하는 콜라주 작업에 몰두해 작품 세계를 만들어갔다.

그런데 그의 캔버스는 자기가 죽을 것을 까맣게 몰랐던 동료처럼 모순적이고 기이하다. 첫 인상은 정교하게 빚어낸 ‘초현실적 그림’이지만, 알고 보면 사회에 대한 통렬한 고발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다. 이처럼 작품으로 사회를 적극적으로 비판한 그는 앤디 워홀, 로버트 라우센버그,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과 함께 미국 팝아트를 이끈 거장 제임스 로젠퀴스트(1933~2017)다.

로젠퀴스트의 회고전 ‘유니버스’가 5일 서울 종로구 신문로1가 세화미술관에서 개막했다. 로젠퀴스트재단과 협력해 기획된 이번 전시에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공개되는 작품들이 대거 벽에 걸렸다. 미국 팝아트 전시가 비교적 작품 대여료가 저렴한 판화로 채워지는 데 반해, 이번 전시는 쉽게 보기 어려운 로젠퀴스트의 원화로 구성된 점이 눈길을 끈다. ‘원화의 감동’에 목말랐던 미술 애호가라면 거장의 손길을 직접 느낄 수 있는 전시다.

2017년 개관한 세화미술관은 태광그룹 산하 세화예술문화재단이 운영하는 미술관으로, 그간 국내 신진 작가와 중견 작가를 조명해왔다. 이번 전시는 개관전을 제외한 첫 해외 작가전이다. 박희정 세화미술관 부관장은 “세화미술관은 미국 팝아트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며 “미국 팝아트 작가 중에 한국에서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는 작가를 발굴해 알리려는 측면이 컸다”고 했다. 미국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팝아트 작가들의 작품 비중을 더욱 확대해 미술관의 얼굴 격인 컬렉션을 강화하겠다는 의미다.

로젠퀴스트는 1950~1960년대 미국의 삶과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는 경쾌한 작품을 시작으로 점차 생태·환경·정치로 관심사를 확장해나갔다. 베트남전 반전 시위에 반대하는 당시 시카고시장의 얼굴을 그린 뒤 세로로 자른 ‘데일리 초상화’(1968)나 총구를 서로 겨누고 있는 ‘동업자 간의 예의’(1996)를 보면 누가 표적인지 되묻는 날 것 그대로의 ‘저돌적 표현’이 드러난다. 예술가 권리 운동에 직접 나서거나 반전 운동으로 체포된 적이 있는 만큼, 로젠퀴스트에게 팝아트는 사회 운동 그 자체였다. 동시대 활동한 다른 팝아트 작가들과는 다소 다른 면모를 보여줬다는 평가다.

반짝이는 셀로판 포장에 싸인 아이 인형을 그린 ‘포장된 인형 8번, 클로드 드뷔시의 인형을 위한 세레나데’(1992)는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이즈) 관련 논의가 활발하던 당시 시대상을 작가의 독특한 시선으로 은유한 작품이다. 이 시기 작가는 적록색맹 여부를 판단하는 이시하라 색맹 테스트에 착안, 다양한 이미지들을 하나의 화면에 구성하는 작업을 선보이기도 했다.

노년의 삶에 접어든 로젠퀴스트의 관심은 우주와 은하로 더욱 커진다. 여든이 넘은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우주 공간을 유영하는 작가의 시적 상상력은 다채롭고도 깊다. ‘수학적 다중우주로 들어가는 입구’(2014)에는 수명을 다한 별이 마지막 에너지를 뿜으며 폭발하는 초신성이 담겼다. 그렇게 블랙홀로 변하는 큰 별 너머의 세계가 어떠한 논리도 없는, 완전한 혼돈의 존재여서 작가가 위안을 얻었던 것은 아닌지 추정되는 대목이다. “우리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여기, 우리는 자연에 있고, 우주의 신비가 주변에 있다. 이러한 미스터리를 그리고 싶다.”

전시는 9월 29일까지, 관람료는 성인 기준 1만5000원.

이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