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국, 고정형 주담대 확대해놓고

빚 늘어나자 부랴부랴 대출 관리

‘땜질식 금융정책’ 비난 목소리

금리 올리지 말라더니...가계부채 늘자 또 ‘은행 탓’

가계빚이 사상 최대로 불어나자 금융당국이 은행권에 대출 수요 억제에 힘써줄 것을 압박하고 있다. 금융위원장이 직접 은행권의 대출 관행 점검을 당부하고 금융감독원도 이달 중 은행 가계대출 현장조사에 나선다.

그러나 금융권 안팎에선 금리 인상기 발생하는 부동산 시장 경직이나 차주의 이자부담 증가 등 여러 문제를 ‘땜질식’으로 해결하려 했던 금융정책도 가계빚 증가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본다.

실제 최근 수요가 크게 늘며 가계빚 증가의 원인으로 지목된 50년 만기 대출이나 특례보금자리론, 3%대 고정형 주택담보대출 상품은 금융당국이 차주의 원리금 상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독려했던 상품이다. 대출 부담을 줄이는 상품을 확대해놓고 다시 가계부채가 늘자 이를 억제하려는 움직임에 전문가들은 금융정책의 일관성이 훼손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금융당국이 확대 주도한 ‘고정형 주담대’, 가계대출 급증 이끌었다=17일 금융권에 따르면 5대 시중은행의 전날 기준 주담대 고정금리는 3.82~5.88%로 변동금리(4.08~6.05%)와 비교해 상하단이 각각 0.26%포인트, 0.17%포인트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은행에서는 변동·고정금리차가 최대 1%포인트 이상 벌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주담대 고정금리는 변동금리에 비해 높게 책정되는 경향이 강하다. 은행의 위험 감수 비용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해 말 금리 인상에 따른 기준금리 정점론이 대두되며 변동·고정금리의 역전 현상이 나타났다. 여기다 고정금리 대출 비중을 늘리라는 금융당국의 주문이 계속되자, 은행권은 고정형 주담대 위주로 대출금리를 내리며 격차를 벌렸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주요 시중은행의 고정형 대출금리는 올 들어 최저 3%대까지 하락하며 대출 수요 상승을 이끌었다.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규제 완화와 함께 만기 50년의 고정금리가 적용되는 특례보금자리론에도 지난달 말 기준 31조원이 넘는 신청액이 몰렸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4월 예금은행의 주담대 고정금리 취급 비중은 80.7%로 2020년 3월 이후 약 3년 만에 80%대를 넘어섰다.

문제는 잠시 수그러들던 가계대출이 다시 급증했다는 것이다. 특히 부동산 거래가 다시 늘면서 고정금리 주담대를 위주로 대출 수요가 늘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7월 말 기준 은행권 가계대출 잔액은 약 1068조원으로 전월(1062조원)과 비교해 6조원 증가했다. 불과 한달 전인 6월에도 한달 새 주담대 잔액만 7조원이 늘어 40개월만에 최대폭을 기록한 바 있다.

주담대 수요 급증은 자연스레 금리도 밀어올리고 있다. 지난 6월까지만 해도 4대 은행은 3%대 금리의 주담대를 판매했다. 그러나 채권금리 상승으로 인해 자취를 감췄다.

금리 올리지 말라더니...가계부채 늘자 또 ‘은행 탓’

▶ ‘엇박자’ 비판에도 완화 정책 강행한 금융당국=가계빚이 순식간에 불어나자, 금융당국은 부랴부랴 가계대출 관리에 돌입했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지난 16일 은행장과 정책금융기관 수장들을 만나 ‘수출금융 종합지원 방안’에서 주제와 무관한 가계부채 문제를 언급했다. 김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대출한도를 늘리기 위해 50년 만기 대출이 사용되거나 비대면 주택담보대출에서 소득확인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복현 금감원장도 같은날 “DSR 규제 관리가 중요해졌기 때문에, 은행들의 주택담보대출 산정 과정이 적절한 지 실태점검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금감원은 이달부터 10월까지 가계대출을 취급하는 국내은행들을 대상으로 ▷대출규제 준수여부 ▷담보가치평가·소득심사 등 여신심사의 적정성 ▷가계대출 영업전략·관리체계 ▷고정금리·분할상환 방식 등 질적구조 개선 관리현황 ▷가계대출 관련 IT 시스템 등을 중점 점검할 계획이다.

금융당국은 앞서 지난 10일에도 유관기관과 함께 ‘가계부채 현황 점검회의’를 열고, 인터넷 전문은행 등에 대한 대출태도 점검과 특례보금자리론 금리 인상을 통한 공급 속도 조절 등을 논의했다. 또 50년 만기 주담대 대출 시 나이나 소득 제한도 방안 중 하나로 검토됐다.

하지만 이같은 움직임을 두고 금융당국의 ‘정책 일관성’이 무너졌다는 비판이 나온다. 예컨대 가계대출 문제의 원인으로 지적된 특례보금자리론은 부동산 연착륙을 위한 정부 정책에서 비롯됐다. 은행권이 고정형 주담대 금리를 낮춰 수요 상승을 유도한 것 또한, 고정금리 비중을 늘리라는 금융당국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다. 대출 완화 정책으로 가계부채를 유발하고, 다시 이를 봉합하는 ‘땜질 정책’ 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금융권 관계자는 “결국 DSR 규제가 풀리고 낮은 금리가 제공되며 가계대출 상승이 유발된 것”이라며 “애초 통화정책과 역행한다는 우려가 계속 나왔음에도 이를 간과한 결과가 나타난 셈”이라고 말했다.

실제 올 초 중앙은행의 긴축 기조가 계속됐음에도 불구하고, 금융당국은 시중은행의 금리 인하 등을 유도해 ‘정책 엇박자’ 논란이 일기도 했다. 당시 대출 규제를 완화적으로 가져갔던 것은 부동산 거래가 적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금감원은 지난 5월 가계대출 점검 회의에서 “현재의 대출금리가 과거 대출 급등기에 비해 높은 수준이고, 주택 거래도 적은 수준”이라며 “가계대출 증가 폭은 제한적일 것으로 판단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대출이 풀리자 주택거래도 살아나고 다시 가계부채가 늘어나는 등 불과 2~3개월 만에 상황은 달라졌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정부 정책은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을 기반으로 해야 하는데, 오락가락하는 정책으로 혼선을 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가계빚이 늘자) 특례보금자리론 등 (실수요자를 대상으로) 혜택을 주기로 한 대출 상품에 대해서까지 추가 조정을 검토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김광우·서정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