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0년 숙종 36년(강희 49년) 조선과 중국 조정의 주목을 받은 범죄 사건이 발생한다. 조선인 아홉 명이 인삼을 캐려고 압록강을 몰래 넘어갔다가 청나라 사람 다섯 명과 마주치자 그들을 살해하고 물건을 훔친 사건이었다. 이 월경 사건이 계기가 돼 1712년(숙종 38년) 백두산에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선을 표시한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진다. 이로써 “서쪽으로 압록, 동쪽으로 토문”이 경계로 정해진다.
그런데 수원지가 복잡한 토문강이 문제가 됐다. 북쪽으로 흐르다가 훨씬 북쪽에 있는 아무르강의 한 지류인 송화강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안 조선 조정은 괜히 시끄러워질까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는 결국 170년이 지나 조선의 빈농 수천 명이 두만강을 건너 만주 동남부의 황무지를 개간하자 영토분쟁으로 비화한다.
한국에선 간도로, 중국에선 옌벤이라 부르는 두만강 북쪽 지역은 이후 러시아의 팽창과 일본의 만주 식민지화로 강대국의 싸움터이자 또 다른 영토분쟁 지역이 된다.
쑹녠선 칭화대 교수가 쓴 ‘두만강 국경 쟁탈전 1881-1919’(너머북스)는 두만강이 한국과 중국, 러시아의 국경선으로 확정되기까지의 역사적 과정을 추적한다.
1885년 1차 국경회담에서 양측은 두만강이 토문강이라는 데는 동의했지만 1887년 2차 국경회담에선 조선이 두만강의 가장 북쪽 물줄기인 홍토산수를, 청은 남쪽 홍단수를 주장하다가 다시 가운데 물줄기인 석을수를 타협안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조선의 거부로 최종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협상은중단됐다.
1909년 청·일간의 간도협약은 청의 석을수안을 일본이 받아들여 경계로 확정한다. 이는 1962·64년 북·중간 다시 경계가 그어져 당초 조선이 제기한 홍토산수로 바뀌게 된다.
쑹넨션은 이 작은 변경 지역에서 발생한 ‘두만강 국경 만들기’는 바로 동아시아 3국이 근대 국민국가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중국은 이 지역을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지켜내려 ‘변경 건설’을 통해 국경과 국민 개념을 도입하고 근대화 개혁을 추진했다. 일본은 제국주의 침략의 교두보로, 한국은 독립을 위한 민족주의적 결집의 상징이었다. 간도(연변)는 바로 동아시아 근대의 바로미터였다는 것이다.
책은 연변 조선족 형성사로도 읽힌다. 간도 인구는 1880년대 수 천명에서 1910년대엔 30만 명으로 늘어났다가 1930년대 일본 관동군의 침략으로 한국과 만주의 국경이 없어지자 더 많은 한국인들이 모여들게 된다. 그 결과, 1940년대 초엔 60만 명을 넘기게 된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한반도의 분단으로 그들은 한국계 중국인이 되고 만다.
경계에 선 연변 사람들은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중국은 무관심했던 이 지역을 어떻게 바라보기 시작했는지 등 새로운 이야기들이 눈길을 끈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두만강 국경 쟁탈전 1881-1919/쑹녠선 지음, 이지영·이원준 옮김/너머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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