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최준선 기자] 전 세계 각국이 기후 변화 대응에 애쓰고 있는 요즘, 탄소 중립이라는 표현은 다소 진부해졌다. 기업들은 플라스틱이 조금만 적게 들어가도 ‘탄소 중립 제품’으로 포장해 홍보하고, 지자체들도 하나같이 ‘탄소 중립 도시’를 조성하겠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우리는 변두리가 아닌, 탄소 중립이라는 목표를 정조준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기업이 있다. 전기저장장치(ESS) 및 배터리를 생산하는 국내 기업 에이치투다. 에이치투는 세계 각국이 탄소 중립을 선언하기 이전부터 재생에너지의 가능성을 주목했고, 재생에너지 발전의 효율을 높여주는 배터리 기술로 미국 시장 내 기술 우위를 인정받고 있다.
에이치투를 이끌고 있는 한신 대표를 만나 탄소 중립에 대한 진심을 물었다.
-에이치투(H2)라는 사명에 어떤 의미가 담겼는지 궁금합니다.
“회사 이름 때문에 다들 수소 관련 사업을 하겠거니 생각하시는데, 우리는 ESS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심장(heart)’을 만들어내겠다는 철학을 담아봤어요. 화석연료 등 기존 발전원이 인류의 첫 번째 심장이라고 한다면, ESS는 두 번째 심장인 거죠.”
-‘카이스트 박사들’이 만든 회사로 알려져 있는데요. 어떻게 창업을 하게 됐나요?
“세계적 경영석학인 짐 콜린스의 저서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를 보면 ‘나아갈 방향이나 비전보다는 어떤 사람과 함께하는지가 중요하다’는 메시지가 나와요. 다행히 제 주변에 함께 사업하고 싶은 동료가 있었습니다. 카이스트 기계공학과 대학원 실험실에서 같이 연구하던 박사 친구(허지향 CTO)였는데, 그와 함께 2010년 회사를 창업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어떤 사업을 할지 구체적으로 정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은 욕심만 있었어요. 어려워서 사람들이 잘 안 하는 일, 그래서 성공해내면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요. 또, 내가 잘하는 일보다는 세상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에 중점을 두고 고민했습니다. 그중에 아직 지배적인 플레이어가 없는 곳을 골라봤더니, 그게 바로 플로우 배터리(흐름전지)였습니다.”
-세상이 배터리를 원하고 있다고 본 이유는?
“전 세계가 탄소 중립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탄소 배출을 줄이려면 가장 먼저 석탄 등 화석연료를 퇴출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안으로 떠오른 재생에너지는 화석연료에 비해 에너지 수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워요. 전기가 넘치는 상황이라고 해서 바람을 멈출 수 없고, 당장 전기가 부족하다고 햇볕이 내리쬐게 할 수 없잖아요.
그렇다 보니 비싸게 만들어낸 재생에너지는 버려지기 일쑤고, 기상 상황이 우호적이지 않을 땐 또 화석연료를 통해 보충해야 해요. 심지어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아질수록 그 간헐성을 보완하기 위해 LNG 비중도 함께 높여야 하는 아이러니도 있고요. 그래서 재생에너지를 오랫동안 저장해둘 대규모, 장주기 ESS가 탄소 중립 시대에 필수적입니다. 우리의 사업이 기후변화의 변두리가 아닌 핵심을 겨냥하고 있다고 말하는 건 이 때문입니다.”
2015년 파리 협정 이후로 탄소 중립에 대한 전 세계의 관심은 급증했다. 한 대표는 그보다 5년 앞서 ESS의 가능성을 주목했고, 그렇게 앞서간 기술력은 투자자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KB인베스트먼트, KDB산업은행, KTB네트워크 등 유명 투자사는 물론 물론 한화큐셀 등 대기업도 에이치투에 투자했다. 지난해 진행된 시리즈B 라운드에선 기후변화 대응 기술에 주목하는 임팩트 투자사 인비저닝파트너스도 참여했다. 에이치투의 누적 투자금액은 332억원이다.
-통상 배터리라고 하면 리튬이온전지를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에이치투가 만드는 플로우 배터리는 무엇이 다른가요.
“통상 방전 지속시간이 4~6시간보다 길면 장주기, 짧으면 단주기로 분류하는데요. 리튬이온전지가 단주기 배터리의 대표라면, 플로우 배터리는 장주기 배터리의 대표예요. 그리고 발전 사업자들이 원하는 건 장주기 배터리고요.
우리는 장주기 배터리 중에도 상업성이 가장 높다고 평가되는 바나듐 소재의 배터리(바나듐레독스 플로우배터리, VRFB)를 만듭니다. VRFB은 우선 수명이 길다는 장점이 있어요. 리튬이온전지는 수천 사이클 수준인 반면, VRFB는 20년, 2만 사이클 이상 사용할 수 있습니다. 화재 리스크도 적죠. 유기계(기름 기반) 전해액으로 만들어지는 리튬이온전지는 화재가 발생하면 전소되기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거든요. 반면 VRFB는 물 성분 수계 전해액을 사용해 화재 위험이 없어요.”
-단점이 아예 없지는 않을 것 같은데.
“사실 VRFB는 리튬이온전지에 비해 효율성이 낮다는 단점이 있어요. 예컨대 전기 100을 충전했을 때 리튬이온전지가 80~85를 회수한다면 플로우 배터리는 70~75 정도만 회수하는 식이죠. 하지만 플로우 배터리가 저장하려는 것은 ‘가치가 낮은 전기’예요. 수요 이상으로 생산돼 버려질 위기에 처한 전기를 저장하는 것이 목적이니까. 그래서 효율성이 낮아도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또 장기적으로 보면 효율성이 낮다고 하기도 힘들어요. 배터리의 수명이 길고, 관리도 쉽기 때문이죠. 발전 사업자 입장에서, 발전 장비를 설치하는 비용과 연료 충전 비용, 유지보수 비용 등을 모두 합친 총 수명주기비용(LCOE)로 따지면 주요 배터리 기술 중 VRFB가 가장 저렴합니다.”
-회사의 기술력을 입증할 만한 사업 실적이 있다면?
“미국 캘리포니아의 20MWh 규모 사업을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VRFB 배터리로 지어지는 발전소 중 미국 최대 규모인데, 지난해 11월 사업 논의가 시작됐고 2024년 7월에 상업 운전에 돌입할 겁니다.
대표적인 VRFB 기술 기업을 사업 실적 기준으로 꼽자면, 일본의 스미토모, 오스트리아의 셀큐브, 영국의 인비니티, 그리고 우리 에이치투까지 네 곳 정도인데요. 이 중 스미토모가 미국 캘리포니아에 9MWh 규모 VRFB ESS를 공급한 바 있는데, 우리가 ESS를 공급하는 캘리포니아 발전소는 이보다 2배 이상 커요. 우리가 전세계 장주기, 대용량 ESS 업체 중 미국 내 1위 위상을 선점하게 된 거예요.
국내에서도 VRFB 상용화를 가장 먼저 했고, 태양광과 연계한 ESS의 상업 운전도 우리가 최초였습니다. 국내에서의 기술력은 단연 독보적이라고 봐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현재 플로우 배터리 시장의 규모는 얼마나 되나요?
“회사를 창업할 때만 해도 우리 기술을 필요로 하는 곳은 많지 않았고 시장 규모도 미미했어요. 하지만 결국은 커질 시장이었죠. 1년 반 전인 지난 2020년 10월, 글로벌에서 처음으로 장주기 ESS에 대한 대용량 입찰이 나왔습니다. 규모는 4GWh에 달하는데, 석탄화력발전소 1기와 맞먹는 조 단위 사업이에요. VRFB만 떼어 놓고 보수적으로 추정해봐도, 2023년 기준 시장 규모가 14조원에 달해요. 2030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만 수십조원 시장이 형성될 것으로 보입니다.”
-플로우 배터리에 대한 국내 사업자들의 수요는 어떤가요.
“내년부터 전남 지역에 8.2GW 규모의 세계 최대 풍력발전 단지가 착공합니다.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늘어나면 그 간헐성으로 인해 전력망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앞서 설명 드렸죠. 실제 제주도에선 풍력발전소가 매년 수십번씩 멈추고 있고, 이런 사태는 앞으로 육지에서도 일어날 겁니다. 그래서 한국전력공사도 이를 보완하기 위한 ESS 사업 계획을 발표했는데, 후보 기술로 VRFB를 꼽았어요.”
-한국 정부의 규제나 인식 측면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우리나라만큼 리튬이온전지 일색인 나라도 없어요. 아예 에너지저장장치를 설명할 때 괄호를 통해 ‘리튬이온전지’라는 단서를 붙일 정도인데, 그 괄호에 따른 제한을 푸는 데에만 2년이 걸렸습니다.
미국의 경우는 달라요. 지난해 6월 캘리포니아는 2026년까지 1GW 규모 장주기 ESS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는데, 반드시 8시간 지속 방전이 가능해야 한다고 선을 그었어요. 이는 단주기의 대표격인 리튬이온전지를 사업에서 배제하겠다는 의미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죠. 또 올 초에는 장주기 ESS에 대한 인센티브 정책도 내놨습니다. 2023~2024년 동안 주 정부 지원금만 4500억원 규모예요. 이처럼 미국은 신기술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습니다.
물론 리튬이온전지가 가장 성숙하고 규모의 경제를 갖춘 기술은 맞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리튬이온전지 위주의 정책만 고수하면, 재생에너지가 중심이 된 에너지 믹스는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없을 거예요. ESS가 포함되면 당연히 전기세는 올라갈 수밖에 없고, 그래서 공공 영역의 지원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정부는 기존 삼성, LG, SK 위주의 리튬이온전지 기술에만 기대고 있는 듯해요.”
-에이치투가 내건 중단기 목표는 무엇인가요.
“5년 내에는 출력 기준으로 국내외 합쳐 연간 1GW 규모의 ESS 생산 역량을 갖추려 합니다. 올해 목표가 연간 330MW 생산 능력을 확보하는 것인데, 5년 이내에는 이보다 30배 이상 더 확장해 규모의 경제를 갖춰보려고요. 1년에 원자력 발전소 1기 이상 만드는 수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발전 사업자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전기를 더 많이 사용할수록 이득이다. ESS도 일종의 발전소이기 때문에, 에이치투 역시 전기 사용량이 많을수록 사업 기회가 많아질 터다. 그럼에도 한 대표는 에너지 사용량을 줄여내는 데 기여하겠다고 강조한다.
ESS 사업자에게 전기는 최종 결과물인 동시에 재료이기도 하다. 100만큼의 전기를 공급하는 데 필요한 전기량을 200에서 150으로 줄여낸다면, 최종 소비자에게 공급될 전기는 그대로이지만 실제 전기 사용량은 줄어들게 된다. 이 과정에서 탄소 배출을 줄여낼 수 있다는 게 한 대표의 설명이다.
“결과적으로 대용량 ESS는 전기 사용량을 줄이고, 나아가 화석연료 발전소나 원전을 추가로 지을 이유도 줄어들 겁니다. 그렇게 전기를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술로 탄소 배출량을 줄여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