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인텔 공동 설립자인 고든 무어는 일렉트로닉스 잡지에 실린 논문에서 반도체 칩에 들어가는 트랜지스터 수가 2년마다 2배씩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무어의 언급은 한 사람의 경험적인 관찰에 불과하지만 다른 인물의 말들과 혼용되고 여러 차례 인용되면서 점차 ‘법칙’처럼 추앙받았고 관련 산·학계에서는 차기 연구·개발(R&D) 목표이자 ‘로드맵’처럼 설정됐다.
우리나라도 반도체 강국으로 거듭난 오늘날까지 무어의 법칙을 따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필자가 근무하는 ETRI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반도체 실험실이 세워진 뒤 1989년 4M DRAM 반도체, 1991년 행정 전산망용 주전산기 타이컴을 개발하면서 우리나라 컴퓨팅산업을 일으켰다. 이를 통해 선진 기술 도입은 물론 독자 모델 개발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면서 우리나라 반도체 생태계를 가꾸는 데 밑거름이 됐다.
아쉽게도 무어의 법칙은 2016년에 깨지고 만다. 멀티코어 간 발열 문제, 누설 전류 등 나노 단위로 작아진 회로에서 물리법칙의 한계가 나타났고 고도화된 공정으로 제조비용도 늘어났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에는 AI 기술이 발전하면서 데이터 소비가 폭증하고 형태도 다변화됐다.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적합한 컴퓨팅을 구현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이어지면서 70년 넘게 컴퓨터 시스템 토대가 된 폰 노이만(von-Neumann) 방식이 근본적인 위기에 직면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데이터 병렬 처리 등 고성능 컴퓨팅기술 향상이 필요하다. 장기적으로는 기존 기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변혁적 방식의 컴퓨팅 시스템 구조 개발, 신소재를 활용한 반도체 개발, 계산모델 개발 등이 요구되고 있다.
이에 ETRI 역시 슈퍼컴퓨팅 시스템 마하(MAHA), 지능형 범용 AI 프로세서 알데바란, 초절전·고집적 마이크로 서버, 모바일 IoT 기기용 시각지능 AI 프로세서 등을 개발해왔다. 기존 반도체 방식의 한계를 근본적으로 뛰어넘고 새로운 4차산업혁명 기술 패러다임에 따라 신기술 요구사항에 맞는 관련 연구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그러나 주요국과 세계적 업체들이 경쟁적으로 투자를 집중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아직까지 국내 상황은 열악하다. 오히려 관련 기술과 제품 해외 의존도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ETRI가 최근 AI 실행 전략을 발표했다. 이는 인공지능 국가전략과 발맞춘 국가연구소의 실천 방안으로 초성능 컴퓨팅 실현을 위해 AI 반도체와 컴퓨팅 시스템 기술경쟁력 강화를 주요 R&D 추진과제로 선정했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는 그동안 반도체 분야에서 쌓아온 기술력을 고도화하고 다가온 AI 시대를 대비해 ‘초성능 컴퓨팅시스템 플랫폼’을 개발하는 것이 절실하다. 장기적으로는 인간 신경계를 SW로 모방해 자율학습이 가능토록 HW로 구현한 ‘뉴로모픽 프로세서’와 그래핀이나 양자와 같은 새로운 소자로 만드는 반도체 및 양자컴퓨팅 원천기술 개발에도 매진해야 한다.
향후 미래 ICT 및 과학기술 경쟁력은 AI 반도체와 고성능컴퓨팅 인프라 원천기술의 향방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가 차원에서 핵심 기술 역량을 축적하고 기반을 구축해 관련산업을 육성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의 AI 반도체와 컴퓨팅 시스템 기술력으로 ‘무어의 법칙’을 다시 달성하는 것을 넘어 우리나라만의 차세대 법칙을 제시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강성원 ETRI ICT창의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