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위, 경찰에 ‘범죄수사규칙’ 개정 권고
[헤럴드경제=박병국 기자] 피의자가 변호인 선임을 요청했지만, 체포 시한이 임박했다는 이유로 변호사 없이 신문을 진행한 것은 인권침해라고 국가인권위원회가 판단했다. 인권위는 증거물 등을 임의로 제출할 시, 피의자의 동의를 받았다는 내용을 기재하도록 범죄수사규칙을 개정할 것도 경찰에 권고했다.
5일 인권위에 따르면 진정인은 “피의자 신문을 받는 과정에서 변호인을 선임한 후 진술하겠다고 하였음에도 이를 무시한 채 조사를 강행했다”는 내용으로 진정을 제기했다. 진정에는 “피의자 신문을 받는 과정에서 담당 경찰관이 진정인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봉인된 소지품을 열람하고 복사하였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담당 경찰관인 피진정인은 변호사 선임과 관련해 “진정인이 계속해 변호인 선임 후 조사를 받겠다며 진술을 거부해서 진정인의 모친에게 연락해 줬다”며 “이후 진정인의 모친이 도착할 때까지 진정인에 대한 피의자 신문을 진행하였는데, 이는 검사의 수사 지휘·체포 시한의 임박에 따른 부득이한 조치였다”고 주장했다.
진정인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소지품을 열람했다는 진정에 대해서는 “추후 소지품을 확인한다고 진정인에게 고지한 후 소지품을 봉인했으며, 봉인을 해제하는 과정에서 범죄 혐의와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자료를 발견해 진정인의 동의를 구한 후 해당 자료를 복사해 피의자 신문조서에 첨부하였다”라고 반박했다.
인권위 조사 결과 진정인은 피의자 신문 초기에 담당 경찰관에게 진술 거부권과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행사한다는 의사를 밝히며 변호인 선임을 위해 자신의 모친에게 연락하여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담당 경찰관은 진정인을 모친과 연락할 수 있도록 해 줬을 뿐 변호사를 선임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고 바로 진정인에 대한 피의 사실 조사를 시작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와 함께 진정인을 신문하며 진정인의 봉인된 개인 소지품을 해제해 자료를 열람했고 그중 일부 서류를 확인한 후 복사하여 조서에 첨부했다는 사실을 조서에 기재했다. 하지만 인권위는 해당 내용에 진정인의 동의가 있었는지 여부는 기재되어 있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
형사소송법은 피의자가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비준한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에서도 ‘변호인의 준비를 위하여 충분한 시간과 편의를 가질 것과 본인이 선임한 변호인과 연락을 취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인권위 침해구제제1위원회는 “진정인이 변호인 선임을 요청한 이상 국제규약에서 정하고 있는 바와 같이 피진정인에게 변호사 선임을 위한 충분한 시간과 편의를 제공할 의무가 있으며, 수사절차를 부당하게 지연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수사를 즉각 중단하고 변호인 선임을 위한 상당시간을 제공하는 등 관련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이어 “수사기관이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여 임의제출 명목의 강제적인 압수를 행할 우려가 있으므로, 제출에 임의성이 있다는 점에 관하여는 수사기관이 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할 수 있을 정도로 증명해야 한다”며 “해당 사건에서 진정인이 임의제출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만한 동의서 등 관련 자료가 없으므로 진정인이 해당 소지품을 임의로 제출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인권위는 경찰청장에게 피의자가 조사 과정에서 변호인을 선임하겠다고 의사를 표시한 경우 즉시 조사를 중단하고 변호인 조력권 보장을 위하여 상당한 편의를 제공할 수 있도록 ‘범죄수사규칙’에 관련 규정을 마련할 것을 권고했다. 수사기관이 수사 과정에서 증거물 등을 임의제출 받은 경우 임의성이 침해되지 않도록 수사관을 대상으로 적법 절차에 관한 직무 교육을 실시하고, 임의제출에 대한 피조사자의 의사를 확인할 수 있도록 ‘범죄수사규칙’에 관련 규정을 마련할 것도 권고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