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 속 ‘고통’ 겪은 주민들 이야기 들어보니

[헤럴드경제(속초)=박병국ㆍ김성우 기자] 5일 오전 10시께 속초 시내. 밤사이 강원도 고성에서 시작된 대형 산불로 인해 대피했던 주민들이 잿더미가 된 ‘옛 보금자리 터’로 돌아왔다. 대부분이 두툼한 외투에 헝클어진 머리. 외투안은 원색톤의 잠옷 차림이었다. ‘몸만 빠져나오라’는 방송에 따라 주민들은 실제로 거의 집에 있다 옷만 챙겨 입은 다음에 집을 버리고 나왔다. 주민들은 잔불과 연기가 매섭게 차오르는 민가를 굳은 표정으로 지켜봤다.

이날 강원도 속초리 영랑동 주민 김모(73) 씨는 검게 그을린 자신의 창고 앞을 떠나지 못했다. 김 씨는 “어제 저녁 아들이랑 밥을 먹는데 산쪽에서 불덩이가 날라왔다”면서 “집앞에 비닐로 포장된 자재들에 불이 옮겨붙었고, 컨테이너와 집이 전소됐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대피소에 가지 않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집에 불이 났는데 어떻게 갈 수 있겠냐”면서 “차에서 머무르며 불길이 잡히는 걸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영랑동 주민 김명하(55) 씨는 “어젯밤엔 피난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오전에서야 정신을 차려보니 친한 친구집ㆍ작은 아버지댁 등 산 밑에 있는 집들은 다 피해를 입었다”면서 “50년 넘게 속초에 살며 많은 불을 봤지만, 바람때문에 이렇게 큰 불이 난 것은 처음이다”고 하소연했다.

주민들에겐 지난밤 속초 시내를 뒤덮은 산불은 ‘공포’로 남아 있었다. 영랑동에서 물류업을 하는 이진우(49) 씨는 “어제 오후 8시께 공무원들의 대피안내를 듣고 창고에서 나오는데 길 가장자리 가로수에는 다 불길이 붙어 있었고 바닥에는 불씨가 돌아다니고 있었다”면서 “불씨가 붙은건 뭐든지 타들어가는데, 폐타이어에 불이 붙으면 폐타이어가 타고, 집에 붙으면 집이 탔다. 공중에는 연기가 자욱해서 한치앞도 쉽게 볼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또 “불길로 창고마저도 전소된 상황”이라며 “창고에서 간신히 지게차만을 꺼낼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속초 소재 12층 높이 D 아파트에 거주하는 윤대근(72) 씨는 “뉴스로 화재를 접하고 하늘을 보니, 산과 하늘이 빨갛게 타고 있었다”면서 “집앞에 있는 민가가 불에 타고 있는 것을 보고 인근의 아는 교회로 대피해 있었다”고 했다.

속초 교동 설악H아파트에 사는 김동명(70) 씨도 “밤에 아파트로 불덩이가 날라온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면서 “오전 2시에 아파트에 전체 주민이 대피하라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사람들이 소리지르고 큰 혼란이 벌어졌다”고 했다.

동명동 주민 허경욱(70) 씨도 “어젯밤에 동네에 불이난 상황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피해 상황을 확인하는데, 바람이 너무 거세서 오토바이를 제대로 운전할 수가 없었다”면서 “바람이 너무 심해서 경찰도 소방도 아무것도 못하는 모습을 보고 허무함을 느꼈다”고 했다.

서울에서 불소식에 속초로 달려왔다는 유모(58) 씨는 “서울에 일터가 있고, 집은 속초라 새벽에 불소식을 듣고 황급히 달려왔다”면서 “하늘도 빨간데, 도로도 전국에서 넘어온 소방차들로 빨갛게 차 있었다”고 했다.

전날 오후 7시 17분께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한 주유소 인근 전신주 개폐기에서 시작된 불로, 속초와 고성에서 4085명이 대피했다. 주택 125채와 창고, 비닐하우스 11개 동이전소됐고, 인근지역 6315가구에 가스공급이 한때 차단됐다. 중앙재난대책본부가 잠정 집계한 고성 산불 피해면적은 250ha(250만㎡)에 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