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를 남자다움에 가두는 맨박스, “고정관념 탈피하면 자유로워” -20대 남자 김영빈, “제 감정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자유로움 얻었다” -3040 육아 아빠 정우열, “아빠는 육아 못한단 고정관념 벗었다” -87학번 문화평론가 정덕현, “87년 바뀐 세상은 일부…성평등 게릴라전이 중요” [헤럴드경제=김유진 기자] “사내 자식이 돼서 왜 울어”, “남자는 강해야지”.

남성들이 익숙하게 듣는 말이지만 미국의 페미니스트 운동가인 흑인 작가 토니 포터가 들었다면 ‘맨박스(Man Box)’라 분개했을 말들이다. 토니 포터는 ‘남자니까 어떠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남자들을 가두는 상자로 비유하며 남성들 역시 성 역할에 대한 억압에서 탈피해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같은 맨박스 개념은 강남역 살인 사건이후 성 대결 양상으로 전개된 국내 페미니즘 담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성역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나 자신의 삶’을 당당히 살아가고 있는 남성 페미니스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91년생 김영빈 “성 고정관념, 깨부수니 자유로와요”= 김영빈 데블스TV 이사는 SNS를 통해 페미니즘 발언을 하는 몇 안 되는 20대 남성이다. 몇차례 SNS에 올린 페미니즘 발언이 화제가 되면서 여성들 사이에 ‘남성 페미니스트’로 소개됐다. 김 씨가 제작하는 영상 컨텐츠 역시 약자 혐오가 없는 청정 컨텐츠로 꼽힌다.

김 씨는 “강남역 살인 사건을 통해 여성들이 겪는 젠더 억압에 눈 떴다. 첫 페미니즘 책으로 ‘맨박스’를 읽고 성역할 고정관념에서 깨어나와 더 자유로워졌다”고 말한다. 가부장적 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자기 표현을 억제하는 성인 남성 모델을 강요받았지만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해 공부하면서 ’감정 표현할 줄 아는 사람, 슬픈 영화를 보고 흘리는 눈물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김 씨는 페미니즘을 통해 남성성과 여성성을 구분짓는 사고는 어느 쪽에게도 불행이라는 점을 배웠다.

그는 “남성성을 투박함, 여성성을 섬세함으로 구분짓는 성 고정관념 때문에 조금이라도 섬세한 남성들에겐 ‘기지배 같다’는 비난이 따라온다”며 “이는 사회가 규정한 남성성을 통해 왜곡된 남성다움을 강요하는 동시에 여성성을 ‘부정적인 것’으로 폄하하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김 씨에게 페미니즘은 “모두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그는 “내 또래 남성들에게도 성 역할 고정관념을 탈피할 때 그 친구들의 삶이 더 자유롭고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3040 아빠 육아 정우열, “육아와 살림, 엄마라서 잘 하는 게 아니다”=아빠 육아휴직이 사상 최대치를 찍었다고 하지만 두 아이의 주 양육자로 수년간 살아온 정 씨만큼 ‘본격적’으로 뛰어든 경우는 드물다. 정신과 전문의인 정 씨는 ‘남자는 육아와 살림을 할 수 없다’는 맨박스를 탈피한 대표적인 ‘육아빠’(육아 하는 아빠) 케이스다.

정 씨는 “아이들이 엄마를 더 좋아하고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있지만 아이들은 ‘주양육자’와 애착관계가 더 두터운 것일 뿐”이라며 아빠가 육아와 살림을 담당하는 정 씨 가정은 두 아이 모두 아빠를 더 따른다고 말했다.

그는 언론에서 육아빠로 조명받을 때마다 본인의 ‘특수성’이 부각되는 사례를 경계한다. 정 씨는 “아이를 너무 좋아했거나 특별한 각오나 다짐을 해서 육아를 시작한 게 아니다. 두 사람 중 누가 육아하는 게 나은지 비교해 합리적으로 결정한 것 뿐“이라며 “육아도 집안일도 성별 관계 없이 하다보면 잘 하게 된다. 육아나 집안일 잘 하게 태어나는 성별은 없다. 안 해서 못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개인적으론 맨박스에서 벗어난 정 씨지만 육아는 당연히 엄마 몫이라고 상정하는 한국 사회에서 육아빠로 살아가란 여전히 녹록치않다. 그는 “맘카페나 학부모 커뮤니티는 으레 엄마 중심으로 구성돼 아빠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아빠 육아자들은 정보력이 떨어진다는 편견도 있는 것 같다”며 해답을 더 고민해보겠다고 말했다.

87학번 문화평론가 정덕현, “80년대 운동방식 보단 일상의 게릴라전이 중요”=1987년 사회운동을 지켜본 문화평론가 정덕현 씨는 기성세대에 속하지만 미디어 속 성 차별을 지적하는 페미니스트 중 한 사람이다. 그런 정 씨에게 뿌리 깊은 남성중심 사고가 몸과 마음에 배어있는 기성세대가 어떻게 바뀔 수 있겠냐고 질문했다. 정 씨는 80년대식 사회운동보단 ‘게릴라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 씨는 “87년 이후 사회가 좋아졌다고 하지만 성평등 영역에서는 큰 발전이 없었다”며 “그때는 노동 문제처럼 비교적 전선이 명확한 싸움을 했지만 성평등 문제는 전선이 명확히 보이지 않아 더 어려운 싸움”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한쪽 성만 변화해선 힘들고 각자 영역에서 싸우는 일상적인 게릴라전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문화평론가인 그가 미디어 속 성 차별을 드러내려 노력하고 있듯이 각자 영역에서 발생하는 성 차별에 눈 떠야 변화의 바람을 불러올 수 있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