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구루’ 로스 러브그로브의 디자인 철학
‘디자인 구루’ 로스 러브그로브의 디자인 철학 “스타일이나 다른 무엇 때문에 디자이너를 꿈꿔서는 안 됩니다. 디자이너는 단지 3차원의 어떤 물체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에요. 디자이너는 문제 해결자이자, 위대한 사고를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과 시스템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고, 디자인할 수 있어야 하죠.” 디자인 업계 ‘선지자’로까지 불리는 세계적인 산업디자이너 로스 러브그로브(58)는 지난 8일 서울 한남동 그랜드하얏트서울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헤럴드디자인포럼 2016’에 연사로 나서 이같은 디자인 철학을 피력했다.
창조작업은‘소재’에 대한 이해가 출발점 예술은 예술 그 자체-디자인은‘목적’에 초점 같은 소재라도, 예술·디자인따라 쓰임새 달라
무조건적 소비지향 풍조‘디자이너의 책임’ 첨단기술과 접목‘낭비없는 사회’구현 나서야
‘~한 것’과‘~해 보이는’것은 완전히 달라 디자인하면 어떤 브랜드를 연상하는 것보다 ‘새로운 種’만드는 것에 대해 생각해야
그는 “디자이너에게는 해결할 만한 문제가 있어야 한다. 직접 문제를 설정할 수 있어야 한다”며 “문제를 설정할 수 없다면, 디자이너가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단지 무엇인가를 아름답게 꾸미는 게 디자이너의 역할이 아니라 도구든 우리 삶이든 시스템이든 , 문제를 개선하는 철학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러브그로브는 이날 ‘세상 밖으로(OUT OF THIS WORLD)’라는 주제로 강연하는 내내 깊이 생각해야 할 묵직한 주제들을 던졌다. 제품을 어떻게 하면 아름답게, 기능적으로 디자인할 수 있는지 등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러브그로브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라는 별에 관한 이야기로 강연을 시작했다.
그는 “지구가 없으면 인류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근데 반대로 인류가 없었다면? 행복한 지구가 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인류가 지구를 오염시키고 자원을 고갈시키는 것을 지적한 말이다. 이어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균형을 찾을 것인가’ 입니다. 행복한 인류와 행복한 지구를 어떻게 동시에 만들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사람들은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걸 열정적으로 얘기하지만, 그 이전에 이 모든 물건들이 ‘어디에서 오는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만들어야 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알루미늄과 탄소, 구리 등의 소재를 차례로 설명했다. “땅(지구)에서 가져오는 이 소재들은 마술과 같습니다. 예술로도 사용가능하고, 기술에도 이용 가능하죠”
그는 같은 소재를 이용하더라도 예술과 디자인은 다르다고 강조했다. 예술은 예술 그 자체를 위해서 이뤄지지만,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목적’을 갖고 하는 것이 차이점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특히 우리 시대의 무조건적 소비주의로 흐르는 경향을 언급하면서 ‘디자이너의 책임’을 또 언급했다. “디자이너들은 이 업계에서 사용하는 지구 자원에 대한 책임이 있다. 더 나아가, 소비자들이 사용하는 최종 결과물에 대한 책임까지도 갖습니다”
강연의 주제는 결국 ‘스마트한 소비’에 대한 강조로 귀결됐다. 지구의 자원이 유한하기 때문에 효율적인 소비를 하는 사람들, 그렇게 만드는 디자이너들이 지구를 지속가능하게 지키고 있다는 설명이다.
러브그로브는 “3000~4000년 전만 해도 모든 인류는 디자이너였다. 모든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무언가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라며 “오늘날에는 3D프린터를 통해 그 시대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만 딱 맞는 신발 한 켤레, 자신만을 위한 맞춤 안경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고 말했다.
그에게 21세기 디자인이라는 건 각종 소재나 자원, 물리학, 원자보다도 더 작은 단위의 나노 기술 등 인류가 가진 모든 것을 활용해서 우리가 원하는 목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야만 ‘낭비가 없는 사회’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용도에 딱 맞게 만들어진 신체와 같다. “자연적인 미학, 완벽한 핏(fit)…21세기 기술이 각 개인을 위한 맞춤형 물건을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물질과 기술을 목적으로, 즉 가공품으로 변화시키는 통역자’라고 표현하며 산업화시대에 선(善)으로 여겨지는 ‘최적화(optimization)’에 대해 부정적인 측면도 지적했다. 최대화를 여러 번 거치면 제품이 너무 완벽해져 더 이상 그걸 뛰어넘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르고, 결국 다른 회사들도 그 제품을 표절하고 카피하게 된다. 우리 일상이 동질화, 진부화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러브그로브는 “‘현대적으로 보이는 것’과 ‘현대적인 것’은 다르다. ‘~한 것’이 아니라 ‘~해 보이는 것’에 속아서는 안 된다”며 “디자인이라고 하면, 어떤 브랜드를 떠올리지 말고 어떤 새로운 종(種)을 만드는 것에 대해 생각하라”고 강조했다.
“지금까지 말한 이 모든 사고를 종합해 참으로 새로운 ‘모델’을 한 번 만들어보세요. 우리 인간이 가진 모든 잠재력을 활용해주길 여러분들에게 바랍니다”
배두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