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과 자동차는 인간을 움직이는 운송수단(transportation)이라는 점에서 동일해요”
가벼운 신발과 공간을 넘나드는 육중한 자동차. 석용배 디자이너는 태생도, 역사도 다른 두 공산품의 디자인 원리가 동일하다고 말한다. 자동차는 최신 과학과 공학의 집합체다. 날렵하고 유려한 외관을 디자인하는 동시에 내충격성, 공기역학, 소음, 연비 등을 고려한 공학적 설계까지 마무리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신발도 세련된 디자인과 인체 공학적 보행 원리를 고루 갖추고 있어야 한다. 기술적으로도 솔, 안창, 소재 등의 요소가 절묘하게 결합돼야만 최상의 디자인이 나온다.
신발 디자이너로 활약하고 있는 석용배 디자이너의 시작은 자동차였다. 그가 27살이 되던 해, 국내에서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하고 자동차 디자인의 본토인 이탈리아로 무작정 날아갔다. 이탈리아 명문 디자인 스쿨 에우로페오(IED)에서 자동차디자인학과를 수료한 그는 이탈리아의 자동치 디자인 기업인 피닌파리나(Pininfarina)에서 페라리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2002년 스포츠 브랜드 휠라에서 ‘패션디자인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의가 왔다. 휠라가 페라리와 파트너십 계약을 체결하고 휠라페라리 컬렉션을 계획하던 중이었다. 그는 흔쾌히 승낙했고, 이후 컬렉션을 마무리하고 휠라 정식 디자이너로 스카웃됐다. ‘신발 디자이너’라는 새로운 활주로가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계절보다 변화의 주기가 빠른 패션 산업의 특성은 석 디자이너 체질에 꼭 맞았다. 그는 누구보다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했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몇시간 만에 작품을 완성하는 한국식 입시 미술 교육은 오히려 그를 혹독한 디자인 세계에 적응시키는 데 톡톡히 역할을 했다.
이후 그는 보수적인 유럽 패션계에서 ‘D&G’, ‘발리’, ‘토즈’ 등 하이엔드 브랜드의 신발 디자이너로 이름을 날리며 입지를 굳혔다. 무엇보다 패션계가 극찬한 것은 그의 남다른 감각과 매출까지 고려한 사업 수완이다. 그는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실제로 경영을 하고 있는 창업자를 만나 브랜드의 설립 역사를 세세한 부분까지 확인하고 숙지한다”며 “내가 갖고 있는 모던한 스타일과 역사적 브랜드의 미래지향적인 접점을 찾아내 매출 상승과 브랜드 이미지 향상을 꾀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그의 균형추 역할은 그가 D&G 슈즈 디자이너로 활동하던 당시 더 빛을 발했다. 그는 D&G 액세서리 라인에서만 매출을 전년 대비 40% 올렸다. 이어 그는 “아직까지 신발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는 것은 많은 브랜드들이 내가 다른 분야로 가게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라며 웃음지었다.
그는 올해 글로벌 브랜드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 ‘세옥(SEOK)’을 런칭했다. 그의 이상과 구상에 가장 근접한 디자인은 메인 상품인 ‘Decon’이다. 수작업을 통해 해체된 여러 조각의 러버를 재조합한 ‘벌커나이징 슈즈’다. 인솔 부분에도 편한 우레탄 소재와 양가죽을 써서 제품의 품질을 높였다. 그는 아시아 뿐만 아니라, 유럽과 미국 런칭을 앞두고 있다.
박로명 기자/do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