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년 고전, 놀런을 만나 스크린에 부활

한국에서 유독 뜨거운 ‘오디세이’ 열풍

‘용아맥’ 예매 전쟁부터 원작 서적 인기까지

전쟁과 귀향, 환대와 속죄가 던지는 질문

서울의 한 영화관에 오디세이 홍보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윤창빈 기자
서울의 한 영화관에 오디세이 홍보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윤창빈 기자

[헤럴드경제=손미정 기자] 오랜 세월 인류와 함께해 온 고전이 크리스토퍼 놀런이라는 연출가를 만나 영화의 옷을 입고, 웅장하고도 몰입감 넘치는 영화적 경험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3000여년 전 호메로스가 쓴 ‘오디세이아’를 원작으로 한 놀런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가 결국 개봉 33일 만인 6일 ‘천만’의 벽을 뚫었다.

영화를 향한 선풍적인 관심은 스크린을 넘어 일상 곳곳으로 번졌다. 개봉과 동시에 서점가에서는 ‘오디세이아’ 관련 서적들이 인기 순위 상위권을 휩쓸었고, OTT에서는 트로리아 전쟁을 다룬 영화 ‘트로이’(2004) 등 관련 콘텐츠가 역주행하고 있다. 특별관 좌석이 웃돈을 얹어 거래되는 암표 현상이 기승을 부리자 정부가 직접 단속에 나서는 사태로까지 번졌다. 누가 뭐라 해도 이 늦여름 극장가를 집어삼킨 것은 단연 ‘오디세이’다.

빛나는 지략으로 기억되는 트로이 전쟁, 그 전쟁의 상흔을 안고 고향에 당도하기 위한 한 영웅의 여정은 어떻게 수천 년을 뛰어넘어 이토록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됐을까. 천만까지의 여정을 짚어봤다.

‘오디세이’ 흥행의 뒤에는 ‘어린이 필독서’가 있었다

영화 ‘오디세이’ [유니버설 픽쳐스]
영화 ‘오디세이’ [유니버설 픽쳐스]

‘오디세이’는 고전을 원작으로 하지만 서사의 진입 장벽이 비교적 낮다. 사실 원작 ‘오디세이아’는 서구권에서 인문학 교육의 핵심 고전으로 오랫동안 다뤄져 왔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서양 고전 문학을 정규 교과과정에서 마주하는 일이 드물다. 그럼에도 트로이 목마로 상징되는 전쟁과, 그 상흔을 안은 한 영웅의 귀향길은 한국 대중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어린이 필독서로 꼽혀온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 덕분이다. 2000년대 초에는 이 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까지 방영되며 인지도를 넓혔다.

덕분에 영화는 그리스 신화에 익숙한 젊은 세대의 선택을 빠르게 받았고, SNS를 통해 신속히 입소문을 타며 단시간 내에 가파른 흥행 궤도에 올랐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익숙한 서사이기 때문에 전 세대가 볼 수 있고, 그리스 로마 신화 만화 덕분에 관심도도 높았다”며 “젊은 세대가 흥행을 주도했기 때문에 영화의 인기가 열풍으로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고전을 바탕으로,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콘텐츠로 일찍이 자리 잡은 점도 흥행의 주요 요인 중 하나다. 관객들이 영화의 진입 장벽을 유튜브 콘텐츠 시청이나 관련 책을 통해 스스로 극복한 사례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함께 보고 관람 후에도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여느 오락 영화와는 분명 차별화된다.

대학생 윤지원(24)씨는 “가족과 함께 영화를 보러 갔는데 모두가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며 “특히 고전적인 작품을 다루는 만큼 액션과 감정선의 밸런스를 비롯해 미묘한 생각과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한 점이 인상 깊었다”고 밝혔다.

이모(39·남)씨는 “많은 영화가 보고 나면 ‘재미있었다’는 감상밖에 나눌 수 없는데, ‘오디세이’는 만듦새부터 서사까지 나눌 감상이 많은 영화란 생각이 들었다”며 “‘왕과 사는 남자’ 때도 느꼈지만, 국내 대중들은 그냥 오락 영화보다 곱씹고 되새김질하는 콘텐츠를 선호하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놀란도 놀랐을 듯”…‘최초 내한’ 거장에 대한 화답

3일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호텔에서 열린 영화 ‘오디세이’ 내한 기자간담회에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
3일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호텔에서 열린 영화 ‘오디세이’ 내한 기자간담회에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

한국은 놀런 감독에게 유독 특별한 시장이다. 그는 ‘다크 나이트’(2008), ‘인셉션’(2010),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 ‘인터스텔라’(2014), ‘오펜하이머’(2023) 등으로 이미 국내에서만 누적 관객 3600만명 이상을 동원했다. 특히 그를 국내에서 천만 감독으로 만들어준 첫 작품인 ‘인터스텔라’는 오히려 북미보다 한국 성적이 더 좋았던 작품이다. 전통적인 극장가 비수기로 꼽히는 11월 개봉이라는 핸디캡을 안고도 천만을 넘긴 것은, 지금 돌아봐도 이례적인 기록으로 평가된다.

당시 놀런 감독은 아시아 투어 기자회견에서 “한국 관객들의 영화에 대한 충성도와 과학적 소견이 높아 ‘인터스텔라’가 흥행한 것 같다”고 밝히기도 했다.

‘오디세이’가 ‘인터스텔라’와 닮은 지점은 쌍천만 기록에만 있지 않다. 유독 한국에서만 열기가 뜨겁다는 점도 판박이다. 실제로 우리나라를 제외한 대다수 국가에서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가 ‘오디세이’를 앞서고 있다.

영화 ‘인터스텔라’
영화 ‘인터스텔라’

북미에서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가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의 역대 박스오피스 1위 기록마저 넘어설 것이란 관측까지 나온다. 미 매체 데드라인은 “다수의 국가에서 배급사 역대 최고 흥행작에 이름을 올린 상태”라고 전하기도 했다. 개봉 직후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를 밀어내고 박스오피스 1위를 줄곧 지켜온 국내 극장가 상황과는 사뭇 다른 그림이다.

한 극장가 관계자는 “국내 관객들에게 놀런 감독에 대한 신뢰가 특히 높다”며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역작이 나오면서, 그에 대한 긍정적인 피드백이 흥행의 마중물이 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런 남다른 애정에도 불구하고, 정작 놀런 감독은 그동안 한 번도 한국 땅을 밟은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오디세이’ 개봉을 앞둔 지난달 초, 데뷔 이후 처음으로 내한했다. 자필 편지로 방한 소식을 알리며 한국 시장에 대한 애정을 미리 드러낸 그는, 기자간담회에서도 “‘인터스텔라’ 때부터 정말 한국에 오고 싶었다”며 “가본 적 없는 나라에서 내 영화를 좋아하는 것이 너무 신기하다. 드디어 오게 돼 너무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불붙은 ‘용아맥’ 예매 전쟁, 이것이 ‘극장 영화’다

IMAX(아이맥스) 상영관의 모습 [CGV]
IMAX(아이맥스) 상영관의 모습 [CGV]

CGV 용산아이파크몰 IMAX관, 이른바 ‘용아맥’ 좌석을 확보하기 위한 예매 전쟁은 개봉 직후부터 천만을 넘은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상영 시작 직전 취소표를 노리는 ‘취케팅(취소표+티켓팅)’이란 신조어까지 생겨났을 정도다. 좌석별 시야를 미리 가늠하는 ‘용아맥 시뮬레이터’가 관객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등, ‘오디세이’ 흥행을 계기로 특정 상영관·특정 좌석을 향한 선호 역시 한층 뚜렷해졌다.

깊어진 취향과 뜨거운 열기를 틈타 고개를 든 것은 암표였다. ‘용아맥’의 희소성이 극에 달하면서 중고 거래 플랫폼에는 정가의 7~8배에 달하는 암표가 등장했다. 십만 원을 웃도는 암표가 기승을 부리자, 결국 문화체육관광부가 영화 분야로 암표근절법을 확대하는 법 개정에 나서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례적인 열기의 밑바탕에는 ‘오디세이’가 제공하는 독보적인 영화적 경험이 있다. 이 작품은 영화사상 최초로 전편을 70mm IMAX 필름 카메라로 촬영했고, 화면이 주는 깊이감과 몰입감은 다른 어떤 작품과도 비교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밑바탕에는 디지털과 인공지능(AI) 시대에도 여전히 아날로그의 힘을 믿는 놀런 감독의 연출 철학이 자리한다.

그는 CBS ‘60분’ 인터뷰에서 “IMAX 필름은 거대한 네거티브 필름”이라며 “제대로 노출되고 제대로 인화돼 큰 스크린에 비추면 다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화질이 나온다”고 말했다. 이어 “이건 인간의 과정이고, 아날로그 과정”이라고 덧붙였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아이맥스 필름 카메라로 촬영을 하고 있다 [유니버설 픽쳐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아이맥스 필름 카메라로 촬영을 하고 있다 [유니버설 픽쳐스]

이런 철학은 CG(컴퓨터그래픽)를 최소화하고 현실 속에서 스크린을 구현하는 방식으로도 이어졌다. 놀런 감독은 모든 촬영을 그리스와 이탈리아, 아이슬란드, 스코틀랜드, 미국 등 실제 자연 속에서 진행했고, 오디세우스에게 시련의 시작점이자 10년 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10.7m 규모의 트로이 목마까지 실제로 제작했다. 오디세우스와 선원들이 탑승하는 배도 실제 항해가 가능하도록 완성됐다. 키르케의 마법으로 선원들이 돼지로 변하는 장면조차 모두 실제 촬영분이다.

놀런 감독은 “압도적인 규모의 세트, 경이로운 로케이션, 수천 명의 출연진 등 관객들을 극장으로 이끌었던 영화의 매력적인 요소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강조했다.

관객들 사이에서도 영화의 거대한 스케일과 아날로그로 구현한 현실감 넘치는 스크린, 예산을 아끼지 않은 블록버스터를 마주하는 경험 자체가 표값이 아깝지 않았다는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모바일 기기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다.

직장인 엄모(39·여)씨는 “다들 극찬을 해서 2년 만에 극장을 찾았다”며 “돈과 시간을 들여도 후회가 없는 콘텐츠라 다들 보러 오는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전쟁, 그리고 가족…시대를 관통한 고전의 존재 이유

영화 ‘오디세이’ [유니버설 픽쳐스]
영화 ‘오디세이’ [유니버설 픽쳐스]

3000년 가까이 살아남은 이야기가 21세기 스크린에서도 통하는 이유는 결국 서사 그 자체의 힘에 있다. 오랜 전쟁 끝에 집으로 돌아가려는 한 남자의 여정, 그를 기다리는 아내와 아들, 그리고 그 사이 켜켜이 쌓인 죄책감과 속죄라는 주제는 시대를 초월해 관객의 삶에 그대로 겹쳐진다.

놀런 감독이 오늘날 이 이야기를 영화화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인류의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정작 영화로는 제대로 다뤄진 적이 없다는 걸 발견하면서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그리스 신화라는 장르는 사실 영화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며 “내가 ‘오디세이’에서 본 건 아직 채워지지 않은 빈틈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탄생한 ‘오디세이’는 흥행작을 넘어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는 중이다. 서점가에서 원작 관련 서적들이 불티나게 팔리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서사에 흥미를 갖고 그것을 더 깊게 알고 싶어 하는 수요가 넘친다는 건, ‘오디세이’가 오늘날 대중에게 전하는 무언가가 분명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실제로 예스24가 발표한 9월 첫째 주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에 따르면, 호메로스 저·김헌 역의 ‘오뒷세이아’가 1위를 차지했다. 호메로스 저·박문재 역의 ‘오디세이아’도 4위에 오르며 종합 5위권에 관련 도서가 두 권이나 이름을 올렸다.

전문가들은 ‘오디세이’가 오늘날 던지는 다양한 메시지 중 핵심으로, ‘제우스의 법’이라 해석된 고대 그리스의 ‘크세니아(Xenia)’ 개념을 꼽는다. 낯선 사람이 문 앞에 나타났을 때 그가 누구인지 묻기도 전에 먼저 음식과 잠자리를 내주고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는 사회적 규범이다.

영화 ‘오디세이’ [유니버설 픽쳐스]
영화 ‘오디세이’ [유니버설 픽쳐스]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는 최근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해 “영화는 환대의 윤리를 깨면 야만 상태에 빠질 수 있고 인류 문명이 무너질 수 있으니, 환대의 윤리를 회복하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쟁의 상흔을 안고 가족에게 돌아가는 여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마주하는 인간의 오만과 속죄는 이 크세니아와 만나 전쟁의 시대를 관통하는 오늘날 인류에게 무엇이 중요하고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오래된 질문으로 이어진다. 고전이 고전으로 살아 숨쉬며, 여전히 인류가 꼭 읽어야할 필독서로 일컬어지고 있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김 평론가는 “영화의 주제 의식이 전쟁과 참회에 대한 부분이기 때문에 오늘날 이란 전쟁을 비롯해 현시대에 던지는 질문이 무겁다”며 “자신이 누군지 알아가고, 그런 자신을 누군가가 오랜 시간 기다려주는 서사가 믿음과 신뢰라는 고전적인 가치를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이라고 짚었다.


balm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