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 =한지숙 기자]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정상들이 13일(현지시간) 협상 17시간 만에 그리스 3차 구제금융안에 합의했다. 유로존이 출범한 1999년 이래 최장의 마라톤 협상 기록이다. 6개월여간 진행된 그리스 3차 구제협상에서 리더십을 보여준 주역들은 약 6명으로 압축된다. 이들은 유럽연합(EU)의 균열을 봉합한 영웅이 될 수도, 그리스를 낭떠러지로 몰아 유로존 분열을 부추긴 죄인이 될 수도 있다.
▷메르켈 ‘강철리더십’ = ‘승리자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다!’ 독일 도이체벨레(DW)가 13일자에 쓴 사설 제목이다.
메르켈 총리는 이번협상에서 ‘유럽의 여제’ ‘철의 여인’이란 수식을 받는 이유를 다시 한번 증명해보였다. 그는 치프라스 총리가 긴축안 찬반 국민투표를 강행하고, 경제학자들을 중심으로 그리스 채무탕감(헤어컷) 요구가 거세질 때도 이를 일축하며 흔들림 없이 원칙을 강조했다.
12일 협상 전에는 “댓가 없는 합의란 없다”며 그리스 국유자산 매각을 비롯해 국민투표 이전보다 더욱 강경한 긴축안을 밀어붙였다. 협상이 타결된 뒤에도 그는 “그리스가 개혁안을 자국 의회에서 통과시키는 등 신뢰를 회복해야 할 것”이라며 쐐기를 박았다. 재임 10년차 총리로서 그는 그리스 최대 채권국인 독일 국민의 여론을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독일 n-tv가 발표한 조사에서 독일인 92%가 그리스 3차 구제금융에 반대하는 등 독일 여론은 그렉시트(Grexitㆍ그리스 유로존 탈퇴) 찬성에 쏠려있었다. 하지만 뒷맛은 씁쓸하다. 독일이 그리스에 “가혹한 정신적 물고문”을 하고 있다는 비판을 듣는 등 스페인, 포르투갈 등 서유럽을 중심으로 반(反) 독일 정서는이전보다 커졌다.
▷올랑드 ‘틈새리더십’ =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메르켈 총리와 치프라스 총리 간의 팽팽한 긴장관계에서 유럽에 존재감을 알리는 반사이익을 얻었다. 올랑드 대통령은 지난해에는 자국 경제 부진, 사생활 위기로 인해 사상 최악의 지지율을 기록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올 초 ‘파리 테러’ 이후 각국 정상들과 손 잡고 반 테러 행진을 하며 보여준 위기 극복의 자세에 더해 그리스 협상에서 통합과 화해의 리더십을 발휘하면서 기사 회생했다. 이번 협상 과정에서 사회당 소속인 그는 같은 좌파 정치인 치프라스 총리를 다독이는 한편, 메르켈 총리를 설득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는 엘리제궁으로 메르켈 총리를 초정해 적극적 중재자로 나섰고, 그리스의 개혁안 작성을 돕고자 재무부 전문가 10명을 파견하기도 했다. 그는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그렉시트를 불사한 메르켈 총리와 달리 “그렉시트는 우리 문명 중심을 잃는 것”이며 “협상 타결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다”며 통합에 전향적이고 긍정적인 메시지를 외부에 알려 왔다.
▷치프라스 ‘허세리더십’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는 그리스 은행의 파산 위기에 채권단의 가혹한 긴축안을 대부분 수용했다. 사실상 ‘백기투항’이다. 그리스 안에선 지난 5일 국민투표는 왜 했느냐는 역풍까지 맞고 있다. 현지언론 타네아는 “5년 이래 가장 가혹하고 굴욕적인” 협상이라고 비판했다.
지난 1월 채권단과의 구제금융 협상을 공약으로 내걸어 총리에 호기롭게 취임한 그는6개월 재임 사상 가장 큰 위기를 맞고 있다. 당장 15일에 그리스 의회에서 개혁법 입법을 통과시키여하지만, 소속인 시리자당 설득도 쉽지 않다. 당 내 급진 좌파의 이탈이 가속화 해 시리자당 해산 위기까지 거론된다. 그는 긴축안 수용에 찬성해 온 야당과 손을 잡아야할 처지다.
다만 6개월간의 협상에서 채무국가임에도 주도권을 놓지 않았고, 그리스의 지정학적 유리를 이용해 EU, 미국, 러시아 등 글로벌 패권국가와의 줄다리기를 즐겼다는 점에선 약소국가 정상으로서 최대한의 정치수완을 발휘했다는 평가도 듣는다.
▷쇼이블레 ‘압박리더십’ =이번협상에서 볼프강 쇼이블레 재무장관은 악역을 자처했다. 11일 유로그룹(유로존 재무장관 모임) 회의에서 독일 재무부가 5년간 ‘한시적 그렉시트’ 허용을 제안했다는 보도가 나온 뒤 그는 유럽 진보 언론과 경제학자들로부터 “독일이 장난을 치고 있다” “쇼이블레가 유럽을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 는 등의 혹독한 비판을 들어야했다. 인터넷엔 그의 얼굴에 나치문양을 합성한 사진이 돌기도 했다. 12일 유로존에 보고된 최종 합의안에서 ‘한시적 그렉시트’는 삭제돼, 쇼이블레 장관의 제안은 결과적으로 그리스를 압박해 타협안을 수용하는 게 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독일 공영방송 ARD 조사에서 쇼이블레 지지율은 70%를 기록, 메르켈 총리의 67%를 앞섰다.
▷차칼로토스 ‘현실리더십’ =유클리드 차칼로토스 그리스 재무장관은 ‘9회말 2아웃’ 상황에서 구원투수로 등판했지만, 빈손으로 마운드를 떠나게 됐다. 야니스 바루파키스 그리스 전 재무장관의 급작스러운 사임으로 재무장관에 올라 국가 명운이 걸린 협상에서 그렉시트라는 파국으로 몰아가지 않고 중간적 자세에서 합의 도출을 이끌었다. 협상 뒤 표정은 침통했다. 바루파키스 전 장관이 협상 타결 뒤 “굴욕의 정치”이자, 1차세계대전 뒤 독일과 31개 연합국이 맺은 강화조약을 빗대 “‘신(新) 베르사유 조약’”이라며 맹비난하는 것과 달리 차칼로토스 장관은 침묵했다.
▷라가르드 ‘조정리더십’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특유의 조정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리스는 지난달 말 IMF에 16억유로의 채무를 갚지 못했음에도 그리스의 채무탕감을 허용해야한다며 그리스에 힘을 싣는 발언을 했다. 또 “그리스 문제에 적극 관여하겠다”며 목소리를 키웠다. 프랑스 재무장관 출신으로 미국 주도의 IMF 수장을 맡아 보이지 않게 ‘그렉시트’를 바라지 않는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과 버락 오마마 미국 대통령을 을 도왔다는 평가도 있다.
그리스의 반대에도 메르켈 총리가 IMF를 옹호함으로써, 막판 합의문에 IMF의 주체적 역할을 명기함으로써 라가르드 총재는 실속도 챙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