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정진영 기자] 꽃샘추위의 세찬 바람에 뼛골이 시려도 봄은 결국 오고야 마는 것입니다. 봄이 다 지나가버린 겨울의 몽니에 문지방을 넘지 못할 적에, 봄을 제자리로 인도하는 것은 제 꽃잎으로 불을 밝히는 동백(冬栢)입니다. 가끔 성질 급한 녀석들은 늦겨울에 눈꽃과 더불어 피어나 눈길을 붙잡곤 하죠. 옛 선비들이 동백을 ‘엄한지우(嚴寒之友)’라고 부르며 귀히 여긴 이유를 이해할 만합니다.
계절을 거스르는 매혹 앞에 동백이라는 이름은 필연이었을 터이지만, 사실 동백은 겨울보다 봄에 흔한 꽃입니다. 동백은 대개 봄의 문턱인 3월에 기지개를 펴 4월까지 꽃을 피우죠. 몇몇 지역에선 동백을 춘백(春栢)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춘백이라는 이름은 이치에는 맞을지언정 각별함과 설렘을 가립니다. 동백은 동백이라고 불러야 제 맛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동백에 대한 이미지는 사실 환상에 가깝습니다. 동백은 다른 꽃들과 비교해 아리따운 맛이 덜한 편이기 때문이죠. 추위를 뚫고 남도까지 찾아와 동백의 박색(?)에 서운함을 느끼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동백의 소박함은 옛 선비들 중 최초로 동백을 향한 시심을 드러낸 고려의 문인 이규보(1168~1241)도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이규보는 한시 ‘동백화(冬栢花)’를 통해 “소나무와 동백에는 아리따운 맵시가 없지만/추위를 견디기에 귀히 여기도다(松柏無嬌顔/所貴耐寒耳)”라고 읊었죠. 하지만 이규보는 이에 앞서 “복사꽃 오얏꽃 비록 아름다워도/부박한 꽃이어서 믿을 수 없도다(桃李雖夭夭/浮花難可恃)”라고 운을 띄웁니다. 그렇습니다. 동백은 추위를 뚫고 홀로 화등(花燈)을 밝히기에 아름다운 겁니다.
동백은 짙은 초록의 잎사귀가 붉은 꽃잎과 보색을 이루고, 붉은 꽃잎은 여린 노란 수술을 감싸고 있어 강렬한 색조를 자랑합니다. 이맘 때 이보다 더 짙은 원색을 발하는 꽃은 없죠. 꽃이 매년 그 때 그 자리에서 피고 지는 이유는, 그래야만 가장 아름답기 때문일 것입니다.
짙푸른 동백 그늘 외곽의 볕드는 곳에선 새해의 풋기가 돌고 있습니다. 동백이 마지막 꽃잎을 떨어트릴 때쯤에는, 제비꽃 주단이 촘촘히 깔리겠군요. 동백의 꽃말은 “그대를 누구보다도 사랑합니다”입니다. 동백이 겨울의 끝에서 봄을 밝히는 이유는 그 누구보다 봄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이제 봄 입니다.
정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