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에 웃고 우는 대한민국
출근시간 늦추고 군부대 이동도 제한…수험생이 무조건 우선인 하루 시험장 주변 소음도 철저하게 관리…듣기평가 시간엔 항공기도 못 떠 20년동안 바뀌지 않은 건…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수험생들의 압박감
# 분당에 사는 직장인 조형준(37) 씨. 그는 매일 아침 서울 회사로 향하는 버스에 지친 몸을 맡긴다. 얼마 전 조 씨는 출근길 뉴스를 들으며 7일로 예정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일이 4일이었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상상을 해봤다. 이유는 좀 단순하다. 4일이 월요일이라서다. 언제나처럼 수능날 출근은 10시까지 하면 되니까 달콤한 주말을 즐기고 월요일 아침에 최소 1시간은 더 잘 수 있다는 복안(?)이다.
# 은퇴생활자 신모(61) 씨는 얼마 전 문구점 앞을 지나다 수능일이 코앞임을 직감했다. 진열된 수능 상품이 눈길을 끌었다. ‘힘내you’, ‘한방에 붙으蔘(삼)’ 등 제목도 한층 튀고 화려해졌다. 관심을 가질 법도 하지만 신 씨의 자녀는 이미 30대 사회인. 그가 ‘수험생 부모’ 딱지를 뗀 지도 10년째다. 신 씨는 “시험장 앞에 엿붙여놓고 기도하던 시절이 막연히 떠오르지만, 자세한 건 기억도 잘 안 난다. 이젠 그저 지하철 빨리 오는 날일 뿐”이라며 가던 길을 재촉했다.
조 씨나 신 씨에게 6일여 앞으로 다가온 수능시험일은 그저그런 목요일일 뿐이다. 하지만 좀 더 들여다보면 그렇지가 않다. 올해 응시생은 65만747명(교육부 기준), 그들의 가족과 친지를 합해 평균 5명으로 어림잡을 경우 우리나라에서 최소 320여만명은 7일 하루 내내 가슴을 졸인다. 그뿐 아니다. 경찰, 대중교통 종사자, 관계공무원, 교사 등을 합해 적어도 수백만명이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는 게 바로 그날이다. 수험생이 무조건 우선인 하루. 수능 당일 대한민국은 뒤집어진다. 시험일 하루만 그럴까. 수험생들의 ‘대학가기 작전’도 수능 시행 20년간 변해왔다.
하지만, 4반세기를 5년 앞둔 수능의 역사 속에서 바뀌지 않은 것이 딱 하나 있다. 수험생들이 받아들이는 압박감이 그것이다.
▶느긋해 보이는 일상 속 ‘뒤집어지는’ 수능시험일=지난달 28일 교육부는 ‘201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시행을 위한 교통소통, 소음방지 및 문답지 수송 원활화 대책’을 발표했다. 한마디로 ‘수험생들 방해하지 말고 시험에만 집중하도록 도와주자’는 취지다. 이 대책엔 수험생을 위해 바뀌는 7일 하루가 그대로 담겨있다.
우선 출근시간이다. 전국 시 지역과 시험장이 마련된 군(郡) 단위 행정구역 내 관공서 출근시간이 오전 9시에서 10시로 늦춰진다. 일반 기업체의 출근시간도 유동적으로 변한다. 한 기업 총무팀에서 근무 중인 이모(31) 씨는 “예년에도 수능일엔 출근을 30분∼1시간가량 늦췄었다” 며 “올해도 별다른 일이 없는 한 수능당일 근무시간은 유동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군부대 이동도 제한된다. 교육부는 시험장이 있는 지역 인근에 군부대가 있을 경우 수험생 등교시간(오전 8시10분까지 고사실 입장)엔 이동을 자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아침 교통도 출근족 대신 ‘수험생 수송모드’로 변신한다. 수도권 전철ㆍ지하철은 러시아워 운행시간이 2시간 늘어나고 운행도 37여회 늘어난다. 시내버스는 오전 6시∼8시10분에 집중 배차된다. 개인택시는 그날 부제운행을 해제한다. 각 행정기관의 비상 수송차량도 총동원된다.
7일 하루는 도심에서 시험장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주변 소음이 관리된다. 교육부는 시험장 주변 공사장, 쇼핑몰 등에서 발생할 수 있는 생활소음도 최대한 자제할 것을 당부했다. 특히 오후가 되면 적어도 30분간 전국은 정적에 휩싸인다. 수능 듣기평가가 실시될 오후 1시10분부터 40분까지는 ‘소음 통제시간’이다. 항공기도 이 시간엔 뜨지 못한다.
▶수능 시행 후 20년간 변해온 수험생의 일상=시험당일만 바뀌는 건 아니다. 수험생의 일상도 20년간 탈바꿈해 왔다. 자영업자 정모(40) 씨는 자칭 ‘수능 모르모트(실험용 쥐) 세대’다. 1993년 8월과 11월에 첫 수능을 치렀다. 시험을 두 번 봤던 유일한 해다. 정 씨는 “주입식 교육이 불필요함을 느낀 첫 입시였다”고 회상한다. 고3 교실에도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서울 강북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정 씨는 반에서 25등 정도 하던 친구가 8월 수능 성적으로 반에서 5등을 했고, 당시 또래들 사이에서 꿈처럼 보였던 ‘인(in)서울 대학’의 목표를 단번에 이뤘다고 전했다. 반면 학교시험에서 항상 10등권을 유지했던 자신은 재수생의 길을 걸었다고. 정 씨는 “이전 학력고사는 4지선다에 답이 하나였다. 수능은 달랐다. 문ㆍ이과 구분도 없었고, 5지선다에 답이 몇개인지도 모르는 문제지를 붙들고 있으니 머리가 노래졌다”고 20년 전을 되뇌었다.
강렬했던 ‘첫 수능의 기억’은 논술과 면접 없이 수능점수만으로 입학생을 선발했던 ‘특차제도’와 맞물려 2000년대 초까지 수험생들 사이에서 독특한 트렌드를 낳았다. 수능점수 총점만 높으면 원하는 대학 진학이 가능해 학교시험 등 내신준비를 등한시 하고 수능공부에만 몰두하는 진풍경이 교실의 일상을 수놓았다. 1998년에 수능을 치른 직장인 권모(34) 씨는 “(당시 수능엔) 교과서에 없는 지문과 내용이 많았기 때문에 수능 공부는 또 하나의 입시준비였다”며 “평소에 책을 많이 읽은 친구들이 유리하다는 소문이 돌면서 ‘학교 수업 안 받아도 대학 간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고 말했다.
수능 특차제가 없어지고 총점보단 과목별 등급이 우선시 되면서 내신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높아진 최근 수험생들은 학교시험 성적에 목을 맨다. 내년에 고3이 되는 임모(18) 군은 “내신성적이 좋아야 수시합격이 가능하기 때문에 일단 학교 성적부터 올리는 게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고3으로 수능을 치르는 문진숙(19ㆍ여) 양도 “올해 봄까진 열공모드의 분위기였는데, 오히려 요즘은 대학 붙은 사람들처럼 편안하다”며 분위기를 전했다.
▶고(高)등급으로 넓어지는 선택의 폭, 변함없는 수험생들의 압박감=하지만 수능 20년째에도 바뀌지 않는 것은 있다. 수험생들이 받는 압박감의 수위는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좋은 점수, 높은 등급은 여전히 꿈을 향한 ‘지름길’로 인식돼서다. 수험생 노주연(19ㆍ여) 양은 “좋은 점수는 좋은 대학에 가는 것, 그래서 꿈에 가까워지는 것을 뜻한다”며 “각오도 남다를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임 군도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대학서열을 갖고 친구들과 대화할 때가 많다”며 “높은 등급을 받아야 선택의 폭도 넓어지는 건 확실한 것 같다”고 말했다.
윤현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