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한국 공연문화의 산실이자 대학로 소극장의 상징 ‘학전’을 이끈 가수 김민기가 21일 별세했다. 향년 73세.
22일 학전에 따르면 지난해 가을 위암 판정을 받은 김민기는 전날 증세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
전라북도 익산에서 태어난 김민기는 중학교 시절엔 미술학도가 되기 위해 동아리 활동도 하며 지냈지만, 서울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셋째 누나의 영향으로 우쿨렐레와 기타를 만지며 음악을 접했다.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 뒤 대학 동기와 도비두라는 이름의 포크 밴드를 결성해 활동했다. 그의 이름이 세상에 나온 것은 1970년 ‘아침 이슬’, ‘가을편지’, ‘꽃 피우는 아이’ 등을 내놓으면서다. 당시 고인은 양희은과 포크 동아리 ‘청개구리’에서 만나 공동 작업을 했다. 솔로 1집을 발표한 이후엔 싱어송라이터로도 두각을 보였다.
고인의 음악은 시대와 세대를 초월해 대학과 거리마다 불리고 있지만, 그의 음악이 세상에 불리지 못한 시기는 길었다. 1972년엔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꽃 피우는 아이’를 가르치다 경찰에 연행, 이 곡은 금지곡이 됐다. 1975년 초엔 유신 반대 운동에서 김민기의 노래들이 불려 보안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당시 ‘아침 이슬’은 금지곡으로 지정됐다. 솔로 1집도 판매 금지 조치를 받았다. 1987년 6월 항쟁 이전까지 이어진 일이다. 이후 전두환 집권기까지 공식적으로 발매된 김민기의 앨범은 하나도 없다.
양희은이 노래한 ‘아침이슬’은 대학생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가며 ‘민주화의 상징’이 됐다. 1987년 민주항쟁 당시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입에선 언제나 ‘아침이슬’이 불렸다.
공연계에 입문한 것은 1970년대다. 1973년 초엔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의 극음악을 작곡해 무대에 올랐다.1978년엔 노래극 ‘공장의 불빛’을 시작으로 1983년 연극 ‘멈춰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 등을 연출했다.
공연계에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은 것은 1990년대가 돼서다. 1994년 독일 극작가 폴커 루트비히가 각본을 쓰고 비르거 하이만이 작곡한 록 뮤지컬인 ‘지하철 1호선’의 한국어 번안과 연출을 맡아 학전에서 올렸다. 2001년엔 독일과 중국, 일본에서 해외 투어 공연을 열었고, 2007년에 독일문화원에서 수여하는 괴테 메달을 받았다. 한국인으로서는 윤이상과 백남준 이래 세 번째 수상자였다. 이 공연은 2023년까지 8000회 이상, 7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았다.
오래도록 ‘저항가요’와 ‘민주화’의 상징으로 각인됐지만, 고인은 ‘백구’·‘인형’·‘식구 생각’·‘꽃 피우는 아이’ 등의 동요를 쓰기도 했다. 이러한 행보는 학전에서도 이어졌다. 그는 학전에서 어린이 청소년 극에 관심을 이어가며 주류 공연계가 관심을 가지지 않는 곳에 마음을 뒀다.
김민기가 이끈 학전은 한국 대중문화계를 이끄는 수많은 스타들을 발굴하고 육성한 인큐베이터였다. 라이브 공연으로 팬들과 만난 고(故) 김광석은 학전이 배출한 최고의 음악인이다. 김광석을 비롯해 윤도현, 나윤선, 정재일 등 음악가들이 학전 출신으로 성장했다. ‘학전 독수리 5형제’로 불린 설경구·김윤석·황정민·장현성·조승우도 배출됐다.
재정난에 시달리면서도 지켜온 학전은 뮤지컬 ‘의형제’(2000), ‘개똥이’(2006)와 어린이극 ‘우리는 친구다’(2004), ‘고추장 떡볶이’(2008) 등을 연출하며 대학로 공연 문화의 산실로 굳건히 버텨왔다. 2024년 3월 15일 학전이 개관 33주년을 맞으며 문을 닫는 학전에서 고인이 연출한 마지막 작품은 ’고추장 떡볶이‘였다.
그는 “좀 더 열심히, 더 많이 뛸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학전을 기억해 주시는 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전하고 싶다”며 지난 시간을 정리했다.
유족으로는 배우자 이미영 씨와 슬하 2남이 있다. 빈소는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24일 오전 8시, 장지는 천안공원묘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