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크리스 밀러(Miller) 미 터프츠대 교수
한투운용 ACE반도체 기자간담회 기조연설
[헤럴드경제=유혜림 기자] 자국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한 전세계 주요국의 대결, ‘반도체 전쟁(Chip War)’이 치열하다. 그간 미국은 주로 설계에 집중하며 생산은 한국과 대만 등에 맡겨왔다. 하지만 최근 자국 반도체 기업 인텔에 약 26조원 규모의 지원을 예고하면서 직접생산까지 하겠다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그러자 중국도 사상 최대 규모의 반도체 투자 펀드를 예고하고 인도까지 '칩워'에 뛰어들었다. '우리 기업이 하나 정도는 무조건 살아야 한다'는 각국 정부들의 위기감이 깔린 것이다.
반도체 관련 필독서가 된 ‘칩워(Chip War·반도체 전쟁)’의 저자인 크리스 밀러(Miller) 미 터프츠대 교수는 28일 서울 여의도 콘래드호텔에서 열린 ‘2024 ACE 반도체 기자간담회’ 기조연설을 통해 "몇 개 국가의 소수 기업들만이 AI의 발전을 뒷받침하는 핵심 기술을 좌우할 것"이라고 했다. 빠르게 변화하는 반도체 산업에선 소수의 국가와 기업만이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얘기다. 또 핵심 기술을 갖춘 이른바 ‘급소’ 기업을 알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밀러 교수는 반도체 산업의 '독점' 구조를 주목한다. 그는 “칩 설계도 반도체 생산를 할 수 있는 기업은 몇 곳밖에 없다"며 “반도체 산업은 수년간의 연구 개발과 막대한 자본 투자를 통해 해자(垓子·성벽 바깥을 빙 둘러싼 물웅덩이, 독점기술 등을 통한 경쟁우위를 뜻함)를 구축한 소수 기업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메모리 칩을 생산하는 삼성과, 전 세계에서 가장 고성능인 프로세서 칩의 90%를 생산하는 대만의 TSMC가 대표적이다. 그는 "첨단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순도와 정교함을 갖춘 소재를 생산할 수 있는 기업도 소수에 불과한다"며 "반도체 장비 기기를 만들어내는 기업 역시 전 세계에 5개(네덜란드 1곳·미국 3곳·일본 1곳) 정도밖에 없다"고 했다.
밀러 교수는 이어 "이를 보면 반도체 산업은 소수의 기업이 주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이들은 수년, 많게는 수십년간 시장을 점유했던 기업들이다. 즉, 이토록 중요한 기술이 소수의 주요 기업에 의해 정의되고 제약을 받고 있다는 의미"이라고 힘줘 말했다.
그렇다면 왜 소수 기업들만이 반도체 공급망을 지배하는 걸까. 밀러 교수는 "반도체 산업이 인류 역사상 수행된 가장 복잡한 유형의 제조업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반도체 제조가 더 복잡해지면서 진입 장벽도 더 높아지는 실정이다. 연구력과 자본력이 약한 후발주자는 엄두도 낼 수 없다는 얘기다.
그는 "보다 나은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물리학, 화학, 재료 과학에 대한 우리 지식의 한계를 시험하는 수준의 기술 발전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반도체 공급망의 상당 부문에서 새롭게 부상할 수 있는 잠재 플레이어는 소수에 불과하다. 심지어 각 시장 부문에서 이윤을 독차지하는 기업은 한 곳뿐인 경우가 많다"고 했다.
'자본여력'도 거대한 진입 장벽으로 작용한다. 이는 각국 정부들이 막대한 보조금을 살포하면서 '칩워'에 참전하는 이유다. 그는 "반도체 설계 비용은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며 "제조 단계로 가기도 전, 반도체 하나를 설계하는 데만 비용이 1억 달러 넘게 든다. 이후 제조 단계로 진입하면 비용은 천문학적으로 더 높아진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팹’ (fab)이라 불리는 신규 반도체 제조시설 하나를 짓는 데 200억 달러 이상 소요되는데, 이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비싼 공장"이라며 "이처럼 막대한 소요 비용은 또 다른 진입 장벽"이라고 했다. 이어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주요 기업, 즉 ‘급소’ 기업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