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러, ‘휴전’과 ‘교전 중단’ 표현 두고 유엔 결의안 ‘씨름’
[헤럴드경제=원호연 기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전쟁이 한 달을 넘긴 가운데 ‘휴전’을 요구하는 국제사회의 목소리가 크다. 이스라엘은 ‘휴전’을 거부하고 있고, 미국은 일시적 ‘교전 중단’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얼핏 들으면 똑같이 총부리를 잠시 거두고 전쟁을 중지하는 것처럼 이해되지만 상황에 따라 ‘휴전’을 할지, ‘교전 중단’을 할지를 두고 분쟁 당사자와 이해관계가 있는 제3국 간 실랑이가 벌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번 가자지구를 둘러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도 마찬가지다.
15일(현지시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뉴욕 유엔본부에서 회의를 열고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교전 중단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찬성 12표, 기권 3표로 가결했다. 결의안에는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가자지구의 교전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는 내용과 함께 하마스가 억류하고 있는 인질을 무조건 석방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겼다.
하마스의 기습 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된 지 39일 만에 나온 유엔 결의안이지만 그 과정은 험난했다. 이번 결의안에 앞서 양측의 군사행위를 중지하거나 휴전을 촉구하는 결의안이 네 차례에 걸쳐 제출됐지만 상임이사국인 미국과 러시아가 서로 거부권을 행사해 번번이 부결됐다. 러시아는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휴전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지지한 미국은 ‘휴전’ 대신 ‘일시적 교전 중단’이라는 표현을 고집했다. 두 개념 차이가 결의안 통과 여부를 가른 핵심 논쟁이었던 셈이다.
사실 이스라엘은 ‘휴전’은 단호히 거부하면서도 지난 9일 이후 가자지구 북부에서 매일 4시간씩 ‘인도주의적 교전 중단’을 시행하는 데에 동의했다. 이 같은 이스라엘의 이중적 태도에 대해 이코노미스트지는 “‘휴전’과 ‘일시적 교전 중단’ 사이에는 단어를 뛰어넘는 정치적 차이가 내재해 있다”고 설명했다.
유엔의 설명에 따르면 ‘인도주의적 교전 중단’은 ‘순수하게 인도주의적 목적으로 적대행위를 일시적으로 중단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이러한 교전 중단은 일반적으로 인도주의적 구호활동이 수행될 특정 기간과 특정 구역에 한정돼 시행된다. 가자지구의 경우 북부의 제한된 지역에만 적용되는 교전 중단을 통해 민간인들이 전투지역에서 대피할 수 있고 유엔 등 국제 구호기구가 식량과 물을 공급할 수 있다.
반면 ‘휴전’은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개념이다. 유엔은 휴전을 ‘통상적으로 정치적 과정의 일부로서 분쟁 당사자들이 합의한 전투 중단 상태’로 규정한다. 이는 영구적인 정치적 타협 가능성을 포함해 이해 당사자들이 대화에 참여할 수 있게 허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즉, 분쟁 상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협상의 여지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대표적인 ‘교전 중단’은 지난 4월 수단 내전 당시 유엔이 분쟁 당사자인 양 군벌에 24시간 동안 전투행위를 중단하도록 촉구한 것이다. 당시 유엔은 수단 난민에 대한 인도주의적 구호활동을 위해 ‘교전 중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지만 수단의 정부 주도권을 둘러싼 군벌 간 협상을 직접적으로 요구하지는 않았다.
반면 지난해 4월 내전 중인 예멘에서 라마단기간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정부 군과 후티족 반군 간 전투행위가 중단된 것은 ‘임시 휴전’ 성격을 지닌다. 당시 후티족 반군과 중재자인 사우디아라비아는 포로 교환에 합의하고 평화협상을 진행했다. 다만 두 차례 연장에도 10월 추가 휴전에 합의하지 못하면서 드론 공격 등 교전행위가 재개됐다.
이번 전쟁에서도 각 측은 ‘휴전’과 ‘교전 중단’을 둘러싸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미국을 비롯해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지지하는 국가는 현 시점에서 ‘휴전’은 하마스의 재정비와 재건을 위한 시간만 벌어줄 뿐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반면 ‘인도주의적 교전 중단’에 대해서는 민간인 희생과 고통을 최소화하면서도 이스라엘이 군사작전을 이어갈 수 있다며 찬성한다.
반면 아랍연맹과 프랑스 등은 ‘휴전’과 팔레스타인 국가수립을 위한 협상을 적극 요구하고 있다. 지난 12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폭격은 정당성이 없다”며 “휴전이 이스라엘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장기적으로 ‘두 국가 해법’을 통해 중동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재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카타르와 이집트, 미국 당국자의 중재를 통해 하마스가 납치한 인질 중 여성과 어린이 50명을 이스라엘에 수감된 비슷한 수의 여성·어린이와 교환하는 대가로 사흘간 교전을 중단하기로 합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이코노미스트는 이스라엘 측이 이 같은 장기간 ‘교전 중단’이 국제적 압력으로 사실상의 ‘휴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