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연희동 자택서 ‘집 콘서트’ 시작

거장 정경화부터 소년 임윤찬까지

21년간 4700명 거친 ‘진심의 음악’

‘1000번째 만남’은 집 밖으로 외출

거장도 찾은 마룻바닥 콘서트...“이곳은 자신이 될 기회”
문지영 피아니스트(좌)와 ‘하우스콘서트’ 박창수 대표 [사진=이상섭 기자]

2007년 9월 21일. 서울 연희동에서 바이올리니스트 고(故) 권혁주와 피아니스트 김선욱의 ‘마룻바닥 콘서트’가 열렸다. 28평의 가정집 거실을 빼곡히 채운 180명의 관객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선 연주자들은 땀방울이 관객의 무릎 위로 툭툭 떨어지고, 피아노 건반 소리는 마룻바닥을 타고 음표로 되살아났다. 2002년 시작해 어느덧 21년. 스물 한 살이 된 ‘더 하우스콘서트’의 잊지 못할 명장면 중 하나다.

무대와 관객의 거리는 고작 1.5m. ‘더 하우스콘서트’는 가장 가까이에서 음악을 만나는 밀착 콘서트였고, 미래의 ‘클래식 스타’를 발굴한 스타 양성소였으며, 활발한 음악 활동을 이어가는 음악가의 오늘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등받이도 없이 방석에 앉아 연주자들의 땀을 다 받아내는 관객들은 싫은 내색도 없이 공연에 푹 빠지더라고요. 장관이라고 표현해도 될까요. 다른 공연장에선 할 수 없는 경험들이 이곳에 있어요.” (작곡가 박창수)

하우스콘서트의 ‘1000번째 만남’을 앞두고 피아니스트 문지영과 ‘하콘’의 수장인 박창수 대표를 만났다. 자신의 연희동 자택을 개조해 국내 최초로 ‘하우스콘서트’라는 개념을 도입한 박창수 대표는 “2002년 월드컵을 보내며 대규모 공연이 음악 예술을 향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진짜 음악을 향유하는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자택의 2층을 공연장의 형태로 만들기 위해 거실과 방 세 개의 벽을 허문 것이 ‘하우스콘서트’의 시작이었다.

거장도 찾은 마룻바닥 콘서트...“이곳은 자신이 될 기회”
‘하우스콘서트’1000회의 비결은 꾸준함에 있다. 이 안엔 성실함으로 공연을 이어온 사람들과 애정으로 공연을 찾은 관객과 음악가들이 있다. 이곳에서 연주자는 성장하고, 미래의 별들이 태어났다. 무수한 실험이 쌓여 음악의 꽃을 피웠다. [더하우스콘서트 제공]

▶마룻바닥의 울림을 생생히...4700명이 거쳐간 21년=‘21년, 42개국, 4700명, 5만8000명’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지난 21년간 전 세계 42개국에서 4700명의 출연자가 매주 무대를 만들었다. 코로나 팬데믹이 당도한 그 시간에도 ‘하우스콘서트’는 건재했다.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서울 연희동에서 시작한 ‘하우스콘서트’는 광장동, 역삼동, 도곡동을 거쳤고, 2014년 12월부턴 대학로 예술가의집에서 관객과 만나고 있다.

하우스콘서트는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없는, 조금은 특별한 공간이다. 공연장의 ‘원칙’은 단 하나. ‘마룻바닥’의 유무다. 그 곳에 앉아 바닥의 울림을 통해 음악가의 이야기를 듣는다. 박 대표는 ‘연주자와의 물리적 거리를 줄이면 클래식 음악에 대한 심리적 거리도 줄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관객에게 ‘하우스콘서트’는 마약같이 중독된다. 귓가에 닿는 연주자의 숨소리, 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울림’을 통한 음악의 전율을 잊을 수 없어서다. 5만8000명의 관객이 모인 이유이기도 하다.

연주자들에겐 언제나 긴장되는 무대다. 문지영은 “관객이었을 때는 어디에서도 해본 적 없는 값진 경험이었지만, 막상 연주자로 서보니 입장하는 순간부터 너무 무서워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느낌”이라고 돌아봤다.

문지영이 처음 만난 ‘하우스콘서트’는 지난 2017년에 열린 피아니스트 박종해의 연주였다. ‘페이지 터너’로 왔던 박종해는 공연 후 와인 파티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가 출연자로 섭외됐다. 문지영은 “공간과 악기를 가지고 노는, 너무도 충격적이고 신선한 공연”이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리고 2년 뒤, 마침내 연주자로 무대에 서던 날의 떨림은 지금도 생생하다. 빼곡히 자리를 메운 관객을 바로 옆에서 마주하는 것은 굴지의 콩쿠르를 석권한 피아니스트에게도 두려움이었다. 그나마 “정면을 보고 연주하는 악기가 아니라 다행”이라며 웃는다.

“열한 번을 출연해도 두려움이 사라지진 않더라고요. (웃음) 하우스콘서트에선 가까이에 앉은 사람들의 기운이 온몸으로 전달돼요. 연주자와 관객이 기를 주고 받으며 일어나는 상호작용은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어요.” (문지영)

20여년의 시간을 보내며 무수히 많은 연주자들이 이곳을 거쳤다. 거장부터 신동까지, 클래식부터 대중음악까지 아울렀다. ‘번개 콘서트’를 통해 거장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숨결을 턱밑에서 느꼈고, 소리꾼 장사익은 물론 ‘클래식 스타’가 되기 전의 소년 조성진(15세), 임윤찬(17세)도 이곳에서 만났다. 첼리스트 한재민은 열한 살에, 피아니스트 김선욱은 열여섯 살에 이 무대에 섰다.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고 부르는 ‘언플러그드 콘서트’를 통해 크라잉넛과 강산에의 생생한 노래를 들었다. 최다 출연자는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인 김재원(31번)이다.

‘하우스콘서트’는 연주자들이 더 사랑하는 무대다. 전 세계 곳곳에서 굴지의 음악가들이 ‘출연 요청’을 보낸다. 매주 공연을 해도 러브콜을 연주자를 모두 수용할 수 없을 정도다. 사실 개런티는 적다. 하우스콘서트는 박 대표의 사재를 털어 해마다 1억씩의 적자를 보며 이어온 기적 같은 공연이다.

입장료는 3만원. 매 공연 수익의 절반을 연주자의 개런티로 돌려주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수용 관객이 적으니 만석이라 해도 개런티는 소소하다. 그럼에도 연주자들은 이 공연을 그리워하며 ‘연어처럼 다시 돌아오고’ 싶어 한다. 박 대표는 “연주자들이 이 곳을 좋은 놀이공간이라고 생각해준다”고 했다. ‘공간의 특별함’과 음악가로의 성장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독특한 연주자 매칭과 신선한 선곡으로 음악의 지평도 넓히기에 다른 곳에선 쉽사리 할 수 없는 도전과 경험이 쌓인다.

“워나 사적이고 친밀한 공간이에요. 연주를 할 때 다이내믹이나 레인지에 있어 다른 성격으로 연주되고, 정말 여리고 작은 소리를 내도 관객들이 귀 기울여 듣는 곳이죠. 이 곳에서 연주자들은 정말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어요.” (문지영)

‘1000번째 만남’은 ‘하콘’의 첫 외출이다. 2000석 규모의 국내 최고 클래식 공연장인 롯데콘서트홀(10월 10일)이다. 여전한 원칙은 ‘마룻바닥 콘서트’라는 점이다. 롯데콘서트홀 최초로 100명의 관객이 무대 위로 올라와 여덟 팀의 음악을 듣는다. 객석 1층을 통째로 비운 극장판 ‘하우스콘서트’다. 에라토 앙상블로 시작해 열한살 첼리스트 김정아와 피아니스트 문지영, 색소포니스트 블랜든 최와 아레테 콰르텟, 오르가니스트 박준호와 생황 연주자 김효영, 앙상블 블랭크로 이어진다.

‘하우스콘서트’를 이끌어온 중요한 음악가이자 이곳의 가치를 잘 이해하는 음악가 중 한 명인 문지영의 연주가 1000회 공연의 중심을 잡는다. 그는 2015년 부소니 콩쿠르에서 우승한 이후, 묵묵히 자신의 길과 음악을 닦아왔다.

박 대표는 문지영에 대해 “완성된 음악가라 무엇을 맡겨도 믿음이 간다”고 말했다. 문지영은 1000번째 공연을 위해 심사숙고해 바흐의 ‘반음계적 환상곡과 푸가’를 들려준다. ‘하콘’의 첫 무대에서도 바흐를 연주했다. 그는 “지나온 하우스콘서트의 시간과 공간의 분위기, 관객으로 공연을 들을 때 특별한 순간을 맞을 수 있는 곡을 생각하며 선곡했다”고 귀띔했다.

‘하우스콘서트’ 1000회의 비결은 꾸준함에 있다. 이 안엔 성실함으로 공연을 이어온 사람들과 애정으로 공연을 찾은 관객과 음악가들이 있다. 이곳에서 연주자는 성장하고, 미래의 별들이 태어났다. 무수한 실험이 쌓여 음악의 꽃을 피웠다.사진은 더하우스콘서트 박창수 대표와 문지영(왼쪽).이상섭 기자

▶연주자들이 더 사랑하는 무대...1000회 비결은 꾸준함=하우스콘서트의 분기점은 2012년이었다. 그 해엔 이른바 ‘대한민국 공연장 습격작전’이 시작됐다.

“우리나라에 500석 이상 규모의 중극장이 400개가 넘는데, 이 공연장에선 공연을 하지 않고 있어요. 각 공연장마다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있는데, 왜 이곳에선 공연이 열리지 않는지, 왜 음악가들은 설 무대가 마땅치 않은지에 대한 고민과 문제의식에서 시작됐어요.” (박창수)

연주자들이 설 수 있는 무대는 언제나 ‘서울’로 한정돼 있었다. 한국엔 실력파 연주자들이 많지만, 그들이 자신을 보여줄 무대는 많지 않다. 문지영은 “독일, 스페인, 프랑스로 연주를 갈 땐 수도에서만 공연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라고 할 수 없는 시골 마을로 들어가 공연을 하는 데도 관객들이 꽉 들어차다”며 “한국은 모든 것이 서울에 몰려있어 지방에서 공연을 한다고 해도 보러오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관객들이 음악회에 가도록 설득하는 문화를 만드는 것 역시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하우스콘서트’가 전국 23개 공연장에서 일주일간 100개의 공연을 열었던 것이 2012년이었다. 이듬해엔 같은 시각 전국 65개 공연장에서 동시에 ‘원데이 페스티벌’을 열었고, 그 다음해엔 한국을 넘어 중국, 일본으로 확대됐다. 무려 94개의 공연장에서다.

박 대표는 “어찌보면 음악을 통한 계몽운동이었다”며 “새로운 공연장을 짓는 것이 문화사업이자 일자리 창출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뛰어난 연주자와 이미 가지고 있는 좋은 공연장이라는 두 가지 소프트웨어를 결합해 활용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문화의식 수준을 높이는 과정이 될 수 있다고 봤다”고 말했다.

문지영은 지난해 경남 함양의 한 초등학교에 다녀왔다. 그는 “크든 작든 공연을 하면 그곳을 찾는 관객들은 진정성을 가지고 오기에 매번 특별하게 다가온다”며 “전교생이 30~40명 정도 있는 시골 초등학교 아이들과의 만남은 특히 오래 남는다”고 했다. 당시를 떠올리며 박 대표는 “아이들은 문지영이라는 피아니스트를 몰랐지만, 이 훌륭한 연주자의 음악을 들은 경험이 잠재적으로 누적돼 미래의 클래식 관객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봤다.

‘하우스콘서트’ 1000회의 비결은 꾸준함에 있다. 사실 2016년엔 파산 위기도 있었다. 박 대표는 “그 해 아버지와 동생이 떠나며 7억원의 유산을 남겨 7년을 더 버틸 수 있었고, 지난해 어머니가 돌아가시며 물려주신 것으로 ‘하콘’이 연명하고 있다”고 했다. 그 안엔 성실함으로 공연을 이어온 사람들과 애정으로 공연을 찾은 관객과 음악가들이 있었다. 이곳에서 연주자는 성장하고, 미래의 별들이 태어났다. 수많은 실험이 쌓여 음악의 꽃을 피웠다.

거실에서 시작해 ‘공연장 습격작전’으로 확장했고, 매년 7월 작곡가 한 명을 테마로 한 달간 매일 공연하는 ‘줄라이 페스티벌’이라는 음악축제도 낳았다. 2020년 당시 13시간 동안 이어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릴레이 연주 아이디어는 “베토벤 페스티벌에 왜 베토벤 소나타를 하지 않냐”는 문지영의 한 마디에서 시작됐다.

하우스콘서트는 한 번 인연을 맺으면 모두가 친구가 되고, 서로의 음악적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비전을 나누는 곳이다. 문지영은 “하우스콘서트에 출연하는 연주자들은 (박창수) 선생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고, 대화하고 싶어한다”며 “너무나 소중하고 특별해 이곳의 가치가 훼손되지 않도록, 내게 정말 소중하고 특별한 사람하고만 공유하고 싶은 공연이 바로 하우스콘서트”라며 웃었다.

1000번을 지켜온 무대는 새로운 날들을 기약하고 있다. 박 대표는 “하우스콘서트의 21년은 제 인생의 전반기였다”며 “이젠 세대교체를 통해 하우스콘서트가 꾸준히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다”고 했다.

고승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