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차 연구원이 중국 경쟁기업에 영업비밀 유출

국내 기업, 저가 모방제품 출현에 매출 타격

징역 2년 실형 처벌과 별개로 진행된 민사 재판

법원 “손해액 적어도 10억원 인정 가능”

담당 변호사 “법원, 기존의 소극적 입장에서 변화”

참고용 이미지. [게티이미지뱅크]
참고용 이미지. [게티이미지뱅크]

[헤럴드경제=안세연 기자] 기술유출 범죄에 경종을 울리는 판결이 나왔다. 한 국내 중소기업의 핵심 기술을 중국 경쟁사에 팔아넘긴 연구원에게 법원이 “10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중국산 저가 모방 제품으로 매출에 타격을 입힌 점 등이 적극 고려됐다.

22얼 법조계에 따르면 수원지방법원 안산지원 2민사부(부장 임수희)는 볼펜용 잉크 제조회사 유엔아이가 전 수석연구원 A씨를 상대로 낸 영업비밀침해금지 소송에서 원고(유엔아이) 측 승소로 판결했다. 법원은 A씨가 “유엔아이에 10억원을 배상하고, 무단 유출한 영업비밀 일체를 폐기하라”고 판결했다.

유엔아이는 세계 3대 볼펜용 잉크 제조회사로, 문구용 중성잉크 분야 세계 점유율 1위 기업이다. 독일 볼펜 파버카스텔과 프랑스 볼펜 빅(BIC)의 제품에 유엔아이의 잉크가 들어간다.

A씨는 유엔아이의 20년 차 수석연구원으로 연구 업무 등을 담당하다 2019년 7월에 돌연 퇴사했다. 퇴사 2개월 전, 브로커를 통해 중국 경쟁사에 이직을 제안받고 한 행동이었다. 채용 조건인 ‘유엔아이의 특정 제품과 동일한 제품 생산'을 위해 A씨는 잉크 표준배합서 등 영업비밀 126개 파일을 중국 경쟁사에 무단 유출하고, 직접 중국으로 넘어가 원재료 명칭을 중국에서 구할 수 있는 대체품으로 변경해 줬다.

A씨의 행동으로 인해 중국 경쟁사는 저가로 동일한 성분의 모방 제품을 출시할 수 있었다. A씨는 그 대가로 5000여만원을 현금으로 받았지만 유엔아이 입장에선 타격이 매우 컸다. 단가 인하 압박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고, 고스란히 매출 감소로 이어졌다.

형사 재판에서 A씨는 부정경쟁방지법 위반·업무상배임 등 혐의로 징역 2년의 실형이 확정됐다. 1심은 2021년 4월, “A씨의 범행은 피해 회사의 존폐를 좌우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어 “피해 규모를 당장 명확한 수치로 나타낼 수 없더라도 이러한 범죄를 가볍게 처벌한다면 국내 기업이 오랜 시간과 큰 비용을 들여 기술 개발에 매진할 동기가 없어진다"며 “해외 경쟁업체가 국내 기업의 기술력을 손쉽게 탈취하는 것을 방치하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2심도 2021년 7월, 검사 측과 A씨 측의 항소를 모두 기각하면서 징역 2년 실형을 유지했다. 양측이 대법원에 상고하지 않으면서 2심 판결이 확정됐다.

형사 처벌과 별개로 A씨는 손해배상 책임도 져야했다. 이미 A씨의 범죄행위가 확정된 만큼 민사재판에서 손해배상 책임 자체를 인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법원은 구체적인 손해액을 계산하는 데 있어서 “사건의 특성상 유엔아이의 손해액을 입증하는 것이 극히 곤란한 것으로 판단된다"며 고민했다.

재판부는 “기술 개발에 투입한 비용에서 A씨가 유출한 기술의 가치만 따로 떼어내 수치화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고, 외부 감정인이 평가한 100억원은 단순 추산액이라 그대로 인정하기도 어려우며, 그렇다고 A씨가 받은 5000만원만 인정하기엔 기술의 경제적 가치에 비해 매우 부족하고. 매출액 감소분을 기준으로 하기엔 코로나19의 영향도 제외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고심 끝에 법원은 유엔아이가 청구한 10억원을 그대로 인정했다. 재판부는 “해당 제품이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 경쟁사가 자체적으로 관련 기술을 개발하는 데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는 비용과 시간 등을 종합하면 적어도 손해액이 10억원엔 달할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설명했다.

현재 이 판결은 확정됐다. A씨 측과 유엔아이 측 모두 항소하지 않았다.

유엔아이를 대리한 배수영 변호사(법무법인 율호)는 헤럴드경제와 통화에서 “법원에서 이례적으로 높은 금액이 인정됐다”고 밝혔다. 배 변호사는 “통상 영업비밀침해 사건은 손해액을 객관적으로 입증하기 어려운 특성이 존재한다"며 “법원이 기존의 소극적인 입장과 달리 적극적인 해석을 통해 기술유출 범죄의 사후 구제뿐 아니라 예방에도 진전된 태도를 보이고 있음을 보여준 사례"라고 했다.


notstrong@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