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금리, 집값 하락기 어김없이 등장한 ‘전세소멸론’
박근혜 전 대통령 “전세시대는 추억이 될 것”
원희룡 장관 “전세제도 수명 다 했다”
집값 하락기, 집주인 전세 놓을 이유 사라져
임대차 제도 개선, 급히 추진해선 안돼
[헤럴드경제=박일한 기자] “전세제도가 그동안 해온 역할이 있지만 이제 수명이 다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한 말입니다. 정부가 ‘전세 폐지’ 정책을 추진하려는 게 아니나며 논란이 확산되네요.
사실 전세 폐지론은 집값 하락기, 저금리 상황에서 단골처럼 등장하는 레퍼토리입니다.
2016년 집값이 본격적으로 오르기 직전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전세시대는 하나의 추억이 될 것”이라고 했죠. 당시 임대차 시장에 전세가 줄고 월세가 급증해 대응책이 필요하던 시기였습니다. 저금리 상황에서 집주인들이 보증금을 은행에 맡겨봤자(그렇다고 투자할 곳도 마땅하지 않고) 돈이 되지 않자 너도나도 기존 전세를 월세로 바꾸던 때였죠.
그보다 앞선 2010년 초반 집값 하락기엔 부동산 전문가라면 누구나 ‘전세시대 소멸’을 이야기할 정도로 흔한 이슈였습니다. 집값이 떨어지니 집주인이 더 이상 전세를 놓을 이유가 없던 시기였죠. 2013년 당시 국토연구원장이었던 김경환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현 서강대 석학교수)는 “전세시장의 축소 및 소멸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했습니다. 김 교수는 윤석열 정부 부동산 정책의 설계자 중 한명으로 꼽히죠.
▶내 집 마련 꿈을 먹고 자란 전세제도 = 집값 하락기에 ‘전세 소멸론’이 등장하는 이유는 전세가 집값 상승을 전제로 생명을 부지하는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5억원짜리 주택을 사 3억원에 전세를 놓는 집주인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기본적으로 전셋값으로 받은 3억원을 뺀 2억원을 자신이 살지도 않는 집에 묻어둬야 합니다. 그러면서 재산세 등 주택을 보유하는 데 따른 각종 세금을 내야 하고요, 주택을 유지하고, 보수하는 비용도 감당해야 합니다. 집이 낡아지는 데 따른 감각상각에 따른 주택 가치의 하락도 감수해야 하죠.
그런데도 집주인이 집을 사서 전세를 놓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세 상승 기대감’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집주인은 전세 기간 동안 부담한 각종 비용과 주택의 감가상각비용만큼 집값이 올라야 손해를 보지 않습니다. 그 이상 오를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 때 집을 사 전세를 놓는 이유가 생깁니다. 5억원짜리 주택이 전세를 놓는 2년 동안 그대로 5억원이라면 누가 전세를 줄까요! 보증금을 빼고 집주인이 묻어둔 2억원에 대한 금융이자와 각종 세금 등만 따져도 2000만원이 훌쩍 넘습니다. 최소 5억2000만원 이상으론 올라야 나중에 집을 팔았을 때 손해는 보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집값이 오르지 않는다면요? 오히려 집값이 떨어지는 상황이라면요? 자선사업을 하는 게 아니라면 누가 집을 사서 전세를 놓을까요. 저금리 상황에서 보증금을 은행에 넣어봤자 이자는 세금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데 말입니다. 자연스럽게 전세 보단 월세를 놓으려는 집주인이 많겠죠. 전세 소멸론이 확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겠죠.
물론 집값 상승기엔 이야기가 다릅니다. 집값이 오를 때 전세제도는 최고의 재테크 수단입니다. 시중 은행에서 주택 구입 자금 대출을 충분히 받기 어려운 무주택자에겐 내 집 마련의 훌륭한 수단이죠. 전세 보증금을 보태면 작은 밑천으로도 내 집 마련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일단 집을 사 전세를 놓으면서 돈을 모았다가 나중에 직접 들어가면 됩니다. 그 사이 집값이 오르면 그 시세차익을 고스란히 누릴 수 있고요.
다주택자도 추가 주택 구입에 따른 대출 부담과 세금 중과가 부담이겠지만, 집값만 그 이상 올라주면 문제될 게 없습니다.
장기지표를 놓고 보면 우리나라 부동산 시장은 일시적 하락기가 있었지만 늘 다시 회복해 최근까지 상승세를 이어왔습니다. 1990년 1기 신도시 입주, 1997년 외환위기,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으로 집값이 짧으면 1~2년, 길면 4~5년 주춤한 적은 있었지만 결과적으론 2021년까지 오름세였죠.
그러니 전세제도는 변함없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겁니다. 전세보증금을 활용해 집을 사려는 사람들은 늘 있었고(요즘은 ‘갭투자’로 부르죠), 세입자들도 매달 돈을 내야하는 월세보다 전세를 더 선호했죠.
그런데 지난해부터 집값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네 번째 하락기에 접어든 겁니다. 이번 하락세가 얼마나 길어질지, 혹시 폭락론자들 주장처럼 대세 하락기에 접어든 건지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전세를 놓아야 하는 집주인 입장에선 근본적으로 전세를 놓을 이유가 사라진 겁니다.
특히 최근엔 ‘전세사기’ 문제가 커지면서 전세 제도 자체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죠. 전세 폐지론이 힘을 얻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이유인 겁니다.
▶실효성 떨어지는 ‘에스크로’ 제도= 그런데 그렇다고 전세가 사라질까요? 참 어려운 문제입니만, 저는 전세는 계속 존재할 것이라고 봅니다. 전세는 정부가 폐지한다고 해서 폐지되는 제도가 아니에요
앞서 언급한 대로 집주인들은 집을 살 때 전세보증금을 활용합니다. 내 집 마련을 위한 사금융 역할을 전세보증금이 해온 겁니다. 이 규모가 어마어마합니다. 한국경제연구원이 추산한 전세 보증금 규모는 무려 1058조3000억원이나 되죠. 정부가 당장 ‘폐지한다’ 어쩐다 하기엔 너무 근 금액이죠.
생각해 보세요. 집주인 입장에서 전세보증금은 돌려줘야 할 빚이에요. 목돈으로 전세보증금을 쉽게 내놓고 월세로 돌릴 여력이 있는 집주인이 얼마나 될까요!
물론 정부는 월세 세액 공제를 확대하는 등 전세에 불리한 제도를 지속적으로 도입해 ‘전세 축소-월세 확대’ 흐름을 유도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정부가 검토하고 있다고 전해지는 ‘에스크로’ 계좌 도입도 그중 하나죠.
에스크로 계좌는 부동산 등 매매계약을 체결한 후 독립적인 제 3자가 대금 지급을 대행하는 서비스인데요. 임대차 기간 집주인이 보증금을 즉시 활용하기 어렵게 합니다. 전세사기를 막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전세를 놓는 집주인 입장에선 영 불편한 제도가 되겠죠.
이 제도가 과연 실효성이 있을까요? 앞서 언급한 대로 집주인들이 전세를 놓는 이유는 집값이 오를 것을 기대하고 전세 보증금을 활용해 미리 집을 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에스크로 제도는 이를 불편하게 하거나 어렵게 합니다.
사실 이미 실패 사례가 있습니다. 국토부는 지난 2016년 9월 시중은행과 퍼스트어메리칸권원보험, 직방과 부동산 거래대금(전월세 보증금) 에스크로 상품을 출시했는데요. 세입자가 계약금과 잔금, 보증금 등을 집주인에게 직접 건네지 않고 은행 등 예치기관에 맡기는 서비스였습니다. 결과는 한 건의 이용자도 없었습니다.
이번이라고 결과가 달라질까요? 개인 간의 사적 계약에 정부가 지나치게 간섭한다는 비판만 커질 게 뻔하지 않을까요.
집값이 계속 오르지 않는다면 전세 시장이 중장기적으로 위축되는 건 분명한 방향일 겁니다. 고가 아파트 등 월세화가 어려운 시장엔 여전히 전세가 존재하겠지만, 전세는 서서히 축소되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겠죠. 굳이 정부가 전세 폐지를 논하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급하고 무리한 부동산 정책은 언제나 시장을 왜곡시킵니다. 문재인 정부에서 숫하게 목격했죠. 정부가 전세사기 대책을 포함한 새로운 임대차 제도 개선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고 합니다. 단기간 성과에 연연해 무리한 정책을 너무 급히 추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