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거장’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오페라의 유령’은 오리지널 공연으로 꾸준히 한국을 찾고 있다. 현재 부산 드림씨어터에서 조승우·전동석·김주택 주연의 한국어 공연으로 관객과 만나고 있다. [에스앤코 제공]
‘뮤지컬 거장’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오페라의 유령’은 오리지널 공연으로 꾸준히 한국을 찾고 있다. 현재 부산 드림씨어터에서 조승우·전동석·김주택 주연의 한국어 공연으로 관객과 만나고 있다. [에스앤코 제공]

“한국이 어쩌다 파워하우스(powerhouse)가 됐지?”

미국에서 다닌 중학교 시절 단짝이었던 알프레도는 최근 전화 통화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근래 국제적으로 활발해지고 있는 K-팝(Pop), K-뷰티(Beauty), K-드라마(Drama), K-푸드(Food)를 접하고, 곰곰이 생각해봤던 모양이다.

‘코리아 파워하우스?’ 이 질문에 내가 웃었는지, 침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20년 전 즈음, 공연계 어른이셨던 어떤 분이 미국 시장을 두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한국은 5000년의 역사가 있고 거긴 300년밖에 안 됐는데, 누가 콘텐츠가 더 많겠냐?”는 이야기였다.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며 이후의 통화는 길어졌다. 알프레도는 영국에 사는 스페인계 미국인이다. 한때 체코 언더그라운드 유명 잡지에서도 일한 경력이 있다. 꽤 글을 잘 쓰는 ‘국제적인 감각’의 글쟁이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작가가 이런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하다니....

오랜 친구인 알프레도가 지금까지 나를 어떻게 봤을지 아주 잠시 궁금해졌다.

어릴 적부터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자란 나를 그저 ‘전쟁을 겪은 불행한 나라, 코레아를 자주 방문하는 아이’로 생각했을까? 전쟁 이후 이렇게나 긴 시간이 흘렀는데 그동안 한국이 조금이라도 발전을 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한국이 열심히 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한국이 어떤 나라인데, 참나....’ 여러 생각이 오갔다.

요즘 알프레도를 비롯한 외국인에게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된다. 한국의 역사나 전통문화를 차치하고 그들에게 ‘요즘’ 한국의 강점은 굉장히 ‘쉽고 빠르고 명확하게’ 설명한다.

“한국 :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나라. 뭐든 빨리빨리 되고 교통 인프라가 잘 돼 있는 곳. 편의시설이 많고 치안 수준이 높은 나라. 인터넷강국(특히 인터넷뱅킹은 그 어느 나라보다 빠르고 편리하다!)이며 최신 장비 욕심이 많은, ‘스마트’한 사람과 ‘스마트’한 장비(기계)를 가진 ‘스마트’한 나라. K-컬처(K-Culture)가 당연한 결과물 중의 하나인, 엄청나게 열심히 달려온 나라와 사람들.”

이런 설명과 함께 덧붙이는 이야기가 있다. 내겐 강점만큼 여전히 불편한 점이 있는 나라라고 말한다. 그 역시 ‘쉽고 빠르고 명확하게’ 설명한다.

“주입식 교육 시스템, 차순위로 밀려나는 개인의 생각, 획일화된 사회, 보여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그에 반해 개인의 취향은 뚜렷하지 않은 사회, 핵가족 중심으로 내 가족과 내 자식만 챙기는 이기적인 분위기, TV가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고 트렌드가 강한 ‘유행의 왕국’, 깊이와 지속성보다 ‘지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 트렌드조차 빨리빨리 갈아엎는 ‘턴오버(turnover)’가 빠른 나라.”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자란 나의 배경은 이러한 사회 현상을 끊임없이 관찰하게 했다. 돌이켜보면 불편하다고 여기는 것 대부분은 한국의 교육, 사상, 사고방식과 관련돼 있었다.

알프레도와의 통화는 내가 평생 일하고 있는 공연예술계에 대한 이야기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한국 공연계에 대한 대화를 알프레도와 이렇게 마무리했다.

“Mechanically it‘s great, electrically it’s behind.”

“하드웨어는 훌륭한데 소프트웨어는 아직이야. 공연장은 좋은데 작품이 아직 못 따라가. 다들 노래는 잘하는데 작곡은 아직이고, 레플리카(replica·음악과 가사는 물론 안무, 의상, 무대까지 똑같이 공연하되 배우만 한국에서 캐스팅하는 것) 작품 구현은 잘하는데 창작은 아직이야.”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 것이 내 직업이라 그런지, 아니면 정말로 발전이 더디다 생각해서인지 공연계에 몸담으며 가장 아쉬운 점은 ‘창작’이다.

헨리 8세의 여섯 왕비 이야기를 담은 웨스트엔드 뮤지컬 ‘식스 더 뮤지컬’이 지난달 서울 코엑스아티움에서 아시아 최초로 내한 공연(3월 26일 폐막)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 3월 31일부터는 같은 장소에서 세계 최초 라이선스 공연으로 한국 배우들이 한국어 공연을 하고 있다. [클립서비스 제공]
헨리 8세의 여섯 왕비 이야기를 담은 웨스트엔드 뮤지컬 ‘식스 더 뮤지컬’이 지난달 서울 코엑스아티움에서 아시아 최초로 내한 공연(3월 26일 폐막)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 3월 31일부터는 같은 장소에서 세계 최초 라이선스 공연으로 한국 배우들이 한국어 공연을 하고 있다. [클립서비스 제공]

물론 하늘 아래 ‘순수 창작이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새삼스럽게 창작의 정의와 철학을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창작이라는 것은 시상식에서 상을 주는 카테고리 안에서의 창작, 새로 만들어진 작품으로의 ‘창작’, 대중이 ‘창작’이라고 하면 느끼는 그 창작을 말하고자 한다.

세계 경제권 11위 안에 들며 급속도로 성장한 한국에서, 게다가 K-드라마, K-영화, K-예능, K-팝에 이르기까지 문화예술 모든 분야에서 우리의 독창성이 담긴 콘텐츠가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때, 왜 공연계의 창작 분야 성장은 이토록 더딜까.

특히 지금의 공연시장은 라이선스(수입 공연은 크게 내한 공연으로 불리는 오리지널과 원작의 판권을 사와 우리말로 공연하는 라이선스 뮤지컬로 분류한다. 라이선스는 레플리카와 논-레플리카(원작은 수정 각색·번안해 국내 정서에 맞도록 재구성) 뮤지컬로 나뉜다)와 레플리카 뮤지컬, 모두가 다 아는 외국 소설과 역사 속 인물을 소재로 한 뮤지컬이 중심이 되고 있다.

한국의 뮤지컬시장은 좀 특이하다. 지금으로부터 35년 전, 한국 뮤지컬시장 초창기엔 대형 창작 뮤지컬이 몇 편 선을 보였다. 이후 소극장과 대극장의 창작은 외국 소재, 외국 인물 위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익히 알려진 모차르트, 베토벤, 라흐마니노프는 뮤지컬의 단골 주인공이다. ‘한국적인 소재’를 가지고 창작을 한 작품은 손에 꼽을 만하다.

물론 소재의 자율성은 존중할 필요가 있다. 대중성과 보편성의 확보를 위해 외국의 소재나 인물을 가져오는 것은 한국 공연계가 거칠 수밖에 없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과정은 과도기일 뿐, 궁극적으로는 창의적인 시각으로 찾아낸 소재들이 ‘창작’의 궁극적 목적이 돼야 한다. 문제는 지금의 과도기가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한국 공연계는 소재의 다양성이 사라지고 있다.

지금의 공연계를 보면 K-컬처를 향한 세계적인 관심이 무색할 만큼 ‘우리만의 것’이 빈약하다. ‘오랜 역사’를 지녀 콘텐츠가 무궁무진한 나라인데 왜 유독 공연계에만 외국 소재가 넘쳐날까.

창작은 ‘창작자가 뭔가에 꽂혀 그 생각들을 다시 뱉어내지 않으면 못 견디기 때문에 하는 일’이다. 하지만 창작의 결과물이 생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무언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았을 때 일정 수준 이상의 퀄리티를 담보해야 한다. 잘 만들어진 결과물을 내놓아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줘야만 창작물들이 살아남는다.

그렇기에 창작은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꾸준한 교육을 통해 공부하고, 전문성을 쌓으며, 끊임없이 훈련하고 개발해 노하우를 만들어야 한다. 심지어 경제적 뒷받침까지 필요로 한다.

‘창작’은 마치 한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과 같은 일이라 시작부터 끝까지 신중하고 섬세해야 한다. 소재를 찾는 것은 이 모든 창작 과정의 가장 첫 번째 관문으로, 가장 창의적인 시선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남들과 ‘같은 환경’에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언가에 꽂힌다는 것’은 어떻게 이뤄질까.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선 ‘창의성’을 가진 인간이 존재해야 한다. ‘창의적인 인간’은 지구의 오만 가지를 경험해야 하고, 느끼고 만지고 보고 들은 감정을 이해해야 한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렇게 받아들인 그 감정과 생각들을 논의해야 한다. 나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관찰해 만든 스토리는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잘 전달하는 역량을 갖춰야 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열린 마음으로 수용해 자신의 창작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불편한’ 환경은 창의력을 가진 사람을 길러내기엔 다소 어려움이 있다. 어떤 부분에선 치명적이다. 한국 사회의 ‘불편한 현실’은 공연계에서도 발견된다. 최고를 길러내기 위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교육 시스템, 타인의 시선과 보여지는 것에 집착한 나머지 개인의 생각과 성격은 묻혀버리는 현상은 늘 안타깝다. 상상력을 무한대로 발휘해도 소재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게 창작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펼쳐내는 창의적인 사람이 많아져서 소재 선정에서부터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고, 그것이 독창적인 창작 결과물도 이어질 수 있다. 게다가 유행에 민감한 사회, 지금의 트렌드를 따라야 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기존과 다른 것은 흥행을 담보하기 어렵다. 완전한(?) 결과, 더 많은 관객을 극장으로 모을 수 있는 작품을 올려야 한다는 결과에 대한 부담은 무언가 좀 다르고 신선한 시도를 주저하게 한다. 한국 공연예술계의 현실 속에서 많은 아티스트가 이러한 고민을 하고 있다. 어려운 여건을 점차적으로 해결해 ‘창의적’인 소재를 활용한 창작과 이를 만들어내는 창작진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창작회의에 들어오는 디자이너들이 연출인 내게 다른 사람이 만든 레퍼런스를 잔뜩 보여주며 ‘이런 식으로 만들려고 한다’고 말하지 않는 날이 오기도 간절히 바라본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이를 받아들이고 최종 조율을 하는 연출가 역시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예술적 기교(artistry)를 길러야 할 필요가 있다.

5000년의 역사가 300년의 역사보다 콘텐츠는 많겠지만 결국 창의력은 또 다른 이야기다. 알프레도가 던진 질문은 이렇게 또 다른 생각으로 향한다.


bonsang@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