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캣츠’ 스페셜리스트 총출동

‘10년차 그리자벨라’ 조아나 암필

“지금 이순간이 최고의 그리자벨라”

1인 3역 ‘극장 고양이’ 이안 존 버그

“나이 들수록 공감…아버지 생각나”

아름다운 외모로 화려한 시절을 보냈지만, 이제는 늙고 초라해진 그리자벨라.뮤지컬 ‘캣츠’에서 불후의 명곡인 ‘메모리’를 들려주는 캐릭터다. [에스앤코 제공]
아름다운 외모로 화려한 시절을 보냈지만, 이제는 늙고 초라해진 그리자벨라.뮤지컬 ‘캣츠’에서 불후의 명곡인 ‘메모리’를 들려주는 캐릭터다. [에스앤코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윤기를 잃고 푸석거리는 잿빛 털, 잔뜩 구부린 허리… 내내 긴장한 채 경계 태세를 풀지 않는다. 금방이라도 달아날 듯, 방심하면 공격할 듯, 누구도 보지 말라는 것처럼, 조심스레 걸어 들어온다. 모두가 수근거린다. “설마 그리자벨라?” “아니야, 그럴리 없어.” 아름다운 외모로 화려한 시절을 보냈지만, 이제는 늙고 초라해진 그리자벨라. 수없이 많은 시간이 쌓이고,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노래를 시작한다. ‘새벽이 오면, 오늘밤 또한 기억이 되겠죠, 새로운 날이 시작될거야.’ (‘캣츠’ 넘버 ‘메모리’ 중)

“‘메모리’를 부르는 장면은 언제나 최고의 집중력이 필요해요. 그리자벨라의 여정을 따라가야만 그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으니까요. 관객들이 특히 기대하는 장면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특별히 신경쓰고 있어요.” (조아나 암필)

‘세계적인 뮤지컬 디바’ 조아나 암필이 다시 한 번 한국을 찾았다. ‘캣츠’(3월 12일까지, 세종문화회관) 투어를 통해서다. 2020년 팬데믹의 한복판에서 관객과 만난 이후 3년이 채 되지 않아 다시 한국에 왔다. 그 때는 ‘사랑의 불시착’(tvN)의 열혈 시청자이자 현빈의 팬이었고, 지금은 방탄소년단(BTS)의 팬이다.

‘캣츠’가 공연 중인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난 조아나 암필은 “올해는 2020년과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며 “팬데믹의 제약이 조금 사라지니 한국 관객의 진가를 제대로 확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배우 이안 존 버그는 고개를 저었다. “분위기는 6년 전이 더 좋았어요.” 그는 2017~2018년 ‘캣츠’ 내한공연 이후 5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았다. 2017년 ‘캣츠’는 한국 뮤지컬 역사상 최초로 누적 200만 관객을 돌파한 ‘전설의 공연’이다. 그는 ‘마스크’를 벗어야 ‘진짜 열기’를 만날 수 있다는 의미로 지난 시간을 들려줬다. 그럼에도 관객들의 여전히 뜨거운 반응은 공감한다. 이안 존 버그는 “코로나 직후라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매일 오르는 무대가 무척 즐겁다”고 했다.

이안 존 버그는 이 작품에서 ‘극장 고양이’ 거스, ‘부자 고양이’에 먹성 좋은 버스토퍼 존스에 ‘해적 고양이’ 그로울 타이거까지 연기한다. [에스앤코 제공]
이안 존 버그는 이 작품에서 ‘극장 고양이’ 거스, ‘부자 고양이’에 먹성 좋은 버스토퍼 존스에 ‘해적 고양이’ 그로울 타이거까지 연기한다. [에스앤코 제공]

“지금이 최고의 그리자벨라”, “나이 먹을수록 공감하게 된 거스”

올해로 ‘캣츠’ 10년차. 조아나 암필은 10대 시절 ‘캣츠’를 처음 만났다.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젤리클 볼’(‘캣츠’ 넘버)을 듣고 반해 공연을 보러갔다. “그 당시 그리자벨라를 연기한 배우에게 반해 저도 이 역할을 꿈꿨어요.” 세 번의 오디션을 본 끝에야 합격. 어느덧 다섯 번의 ‘캣츠’에 이름을 올리며 유럽, 중동, 아시아의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삶의 경험과 지혜가 쌓이니 매 시즌마다 깊이가 달라진다고 느껴요. 지금 보여주는 그리자벨라가 제가 할 수 있는 최고 버전의 그리자벨라의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조아나 암필)

‘캣츠’ 팀의 큰 형님인 이안 존 버그는 1인 3역을 소화한다. ‘극장 고양이’ 거스, ‘부자 고양이’로 먹성 좋은 버스토퍼 존스에 ‘해적 고양이’ 그로울 타이거까지 연기한다. 그에게 이 역할은 무척 특별하다. 한 때는 유명 배우였던 거스는 가장 빛나던 시절을 동력 삼아, 매일을 꿈에서 보낸다. 누더기 의상을 걸쳐 입고, 중풍으로 발을 덜덜 떨면서도 그 시절 안에서 행복에 잠긴다.

“나이가 들며 점점 더 공감대가 커져요. 여기가 끝은 아니지만, 직업적으로도 어느덧 끝을 향해 가는 나이가 됐고 조금씩 위치가 달라지고 있죠. 무대에 설 때마다 조금 더 새롭게 다가오곤 해요.”

거스를 연기할 때마다 또 다른 얼굴도 떠올린다. 아마추어 배우로 활동했던 그의 아버지다. 이안 존 버그는 “은퇴 이후 30년간 배우로 활동한 아버지는 배우가 직업인 나보다 더 많은 공연을 했다. 아버지와 목소리가 많이 닮아, 거스의 대사를 할 때마다 아버지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고양이 가구가 늘기 시작하며 ‘캣츠’는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를 넘어 이른바 ‘냥집사’(고양이 집사)들의 필수 관람 콘텐츠가 됐다. [에스앤코 제공]
고양이 가구가 늘기 시작하며 ‘캣츠’는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를 넘어 이른바 ‘냥집사’(고양이 집사)들의 필수 관람 콘텐츠가 됐다. [에스앤코 제공]

분장부터 행동까지…‘캣츠’를 준비하는 시간

‘캣츠’와의 오랜 시간은 배우들을 ‘달인’으로 만든다. 배우들이 직접 고양이 분장을 하기에 무대 아래에서도 모든 배우가 쉴 틈이 없다.

이안 존 버그는 ‘캣츠’ 무대에 오르는 모든 배우 중 가장 분주하다. 그는 “공연 동안 6번의 메이크업을 하고, 8번의 의상과 가발 교체를 한다”고 했다. 분장에 걸리는 시간은 고작 20~30분. 거의 ‘신의 손’ 수준이다. 주말은 특히나 전쟁이다. 2회 공연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대기실은 구경도 못한다”고 한다. 늘 무대 위에 있거나, 분장실에 머문다. 공연 중 분장 일정을 읊어주는 그의 말속도가 부쩍 빨라졌다. 분장 속도 못지 않은 속사포다.

“1막에서 ‘젤리클 고양이들의 젤리클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 모든 고양이들이 나와 노래하며 춤을 춰요. 그 장면부터 시작이에요. 무대를 마치고 내려와 ‘부자 고양이’ 버스토퍼를 연기하기 위해 메이크업을 바꾸고, 가발을 교체하죠. 그런 다음 무대를 마치고 내려와 다시 초반 메이크업으로 돌아갔다가 2막에서 거스와 그로울 타이거를 준비하기 위해 분장을 다시 하고, 수염도 붙여요. 후우. 주말엔 이렇게 총 16번 체인지가 필요해요. 가장 바쁜 캐스트가 맞네요. (웃음)”

조아나 암필에게도 지난 10년은 ‘분장 전문가’가 되기에 충분했다. “처음엔 1시간 30분이 걸리던 분장”은 이제 20분으로 줄였다.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눈화장이다. 눈 아래로 가늘고 길게 내려온 눈썹은 힘겨운 오늘을 견뎌내는 그리자벨라의 눈물처럼 보인다.

이안 존 버그가 연기하는 인생을 즐기고, 음식을 사랑하는 버스토퍼 존스 [에스앤코 제공]
이안 존 버그가 연기하는 인생을 즐기고, 음식을 사랑하는 버스토퍼 존스 [에스앤코 제공]

‘캣츠’ 스페셜리스트에게도 이 작품은 만만치 않다. 연기에 있어 어려운 점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완벽한 고양이’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저마다의 노하우를 총동원한다. 배우들은 “다큐멘터리 영상이나 유튜브 콘텐츠”를 보고 고양이의 행동을 분석했다. 1인 다역을 하는 이안 존 버그는 “인생을 즐기는” 버스토퍼 존스와 “우울하고 상처입기 쉬운” 거스, 강인한 그로울 타이거를 오간다.

“연습 과정에 즉흥 연기 세션이 있었어요. 스피커로 새소리를 들려주고 내가 고양이라면 어떻게 반응을 할 것인지 즉흥 연기 시간을 가지며 연습했죠. 배우들끼리 좋은 영상을 서로 추천해주기도 했고요. 호텔 근처나 리허설을 했던 장소 인근에서 고양이들을 관찰하면서 행동을 익힌 것도 도움이 됐어요.” (이안 존 버그)

조아나 암필의 그리자벨라는 복합적인 캐릭터다. “‘상처 입었지만’, ‘불굴의 의지’과 ‘자부심’을 가진 고양이”다.

“무리에서 버림받아 오랜 세월 떠돌았고, 그래서 많이 지쳐있는 상태예요. 마음의 상처도 크지만, 사람들이 담배로 지져 몸에도 상처가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늘 천천히 움직이고, 허리를 숙여 걸어요. 유일하게 하이힐을 신는 고양이이기도 하고요. 이런 상황에서도 의지가 강한 캐릭터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배우의 캐릭터 분석은 무대에서 고스란히 묻어난다. 어둔 밤거리의 길고양이처럼 주위를 살피고, 무리에서 배척 당하면서도 결국 ‘새 날’을 기다리며 일어선다. ‘메모리’까지 이어지는 그리자벨라 서사다.

아름다운 외모로 화려한 시절을 보냈지만, 이제는 늙고 초라해진 그리자벨라 [에스앤코]
아름다운 외모로 화려한 시절을 보냈지만, 이제는 늙고 초라해진 그리자벨라 [에스앤코]

사람의 몸으로 고양이의 몸짓을 담아내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현실적인 어려움이 따라온다. 체력적인 부분에서다. 그리자벨라는 구부정한 자세와 하이힐로 허리 통증을 달고 산다. 이안 존 버그는 “고양이 연기를 하다 보면 쭈그려 앉고 기어야 하는 신이 많다”며 “그동안 했던 공연 중 가장 어려운 공연”이라고 했다. ‘캣츠’ 연습 현장에 언제나 물리치료사가 함께 하는 이유다.

1981년 5월 웨스트엔드 초연 이후, 전 세계에서 무수히 많은 배우들이 ‘캣츠’를 연기했다. 배우들의 노력이 켜켜이 쌓이며 ‘캣츠’는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스테디셀러가 됐다. 긴 시간 한 작품을 해올 수 있었다는 것은 배우들에게도 이 작품이 그만큼 특별하기 때문이다. 조아나 암필은 “모두가 아는 명곡인 ‘메모리’를 매일 밤 부를 수 있는 영광이 주어진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무대마다 작품의 의미를 되새긴다고 했다.

“‘캣츠’엔 정치적인 내용도 없고, 사람들의 의견이 갈릴 만한 내용도 없어요. 보편적인 이야기를 다루며 전 세계 사람들이 사랑하는 클래식으로 자리 잡았죠. 모든 세대를 포용하는 다양한 요소를 담은 공연이에요. 여러 세대의 관객이 무대 위 고양이들과 호흡하고 교감하는 참여형 공연이기에 코로나 19 이후 더 많은 세대와 어우러지는 힘을 발휘한다고 봐요.” (조아나 암필, 이안 존 버그)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