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스케 감독 낙상사고…공항서 긴급유턴
베토벤 ‘합창’ 하루 15시간씩 악보 공부
“음표가 주는 에너지 활활 타오르는 느낌”
15~16일 롯데콘서트홀 송년음악회
시계는 지난 7일로 되돌아간다. 긴박했던 순간이었다. 한국에서의 지휘 공연을 마치고 독일의 집으로 되돌아가던 길, 김선욱은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전화를 받았다. “14~16일이 연주이고, 12일부터 리허설인데 지휘를 맡아줄 수 있겠냐”는 부탁이었다. 오스모 벤스케 음악감독의 갑작스러운 낙상 사고로 서울시향은 당장 코앞으로 다가온 송년콘서트 ‘합창’(베토벤 교향곡 9번)의 대체 지휘자를 찾아야 하는 다급한 상황이었다.
스타 피아니스트이자 데뷔 1년 11개월이 된 신입 지휘자는 “공항에 갈 때까지 30~40분만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만 34년 일생에서 제일 고심을 많이 한 시간이었어요.” 주어진 시간은 나흘. 전 세계에서 가장 히트한 클래식 음악이자, 베토벤의 가장 위대한 교향곡이었다. 공부할 ‘시간적 여유’도 부족했다. 3년 같은 30분의 고민 뒤엔, 단호한 결단이 내려졌다.
“결국 ‘베토벤’이기 때문이었어요.” 김선욱에게 베토벤은 각별하다. 그는 음악계에서도 유명한 ‘베토벤 덕후’다. “어릴 땐 독일, 오스트리아 출생의 작곡가들에게 이유 없이 끌렸다”고 한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연주했고, 그의 음악 인생엔 중요한 순간마다 베토벤이 함께 했다.
“‘합창’ 실황을 처음 들었던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였어요.” 그날이 기억은 지금도 선연하다. 1999년 12월 31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1열. 그의 롤모델인 지휘자 정명훈과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현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연주였다. “그 때 전 지휘자를 꿈꾸던 아이였어요. 이 곡을 들으며 내가 ‘합창’을 지휘하는 순간이 과연 올까, 언젠간 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됐어요.”
‘신입’치고 기회는 빨리 왔다. ‘합창’ 지휘를 꿈 꾼 지는 23년만.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차를 돌려 호텔로 돌아왔다. 그날이 7일 오후 12시경. 서울시향에서 퀵으로 보낸 ‘합창’ 악보가 김선욱보다 먼저 도착해있었다. “이날 오후 1시부터 자체적으로 자가격리를 시작했어요. 호텔 밖으로 나가지 않고, 하루에 15시간씩 악보를 봤어요. 제 짧은 인생에 이렇게까지 온 영혼과 정성과 생각을 다한 게 얼마 만인가 싶더라고요. (웃음)”
두 번째 리허설을 마친 지난 13일 만난 김선욱의 얼굴은 밝았다. 꾸준하고 성실한 준비가 모토였던 그에겐 여러모로 변칙적인 상황이었지만, 그는 “지금까지는 순항 중”이라며 “후회없이 준비했다”고 말했다.
호텔 방에 틀어박혀 ‘악보 공부’를 시작하자, 문제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음악 자체가 가진 힘이 어마어마해 압도가 됐다”고 한다.
“악보가 가진 힘, 음표가 주는 에너지가 어마어마해 불이 활활 타오르는 느낌이었어요. 베토벤 음악이 그래요. ‘합창’은 베토벤이 자기 인생의 열정과 능력을 모두 쏟아부은 작품이에요. 이 음악을 하나로 모아 주무르려면 정말 머리를 많이 써야 해요. 곡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작업이 필요했어요. 첫날은 압도 당했고, 둘째 날은 힘들었고, 셋째 날, 넷째 날이 되자 이 불덩이를 조금씩 조절하기 시작했어요.” 단원들에겐 “귀가 들리지 않던 베토벤을 상상하며 데시벨의 한계를 넘어 마음에서 우러나는 소리와 음향을 생각해달라”고 주문했다.
세 살 때 피아노를 시작해 “음악에 미쳐있던 아이”는 어느 곳에서나 ‘음악가’로 존재했다. 스스로를 음악가라고 생각하고 걸어온 길에서 피아니스트로 조금 먼저 두각을 보였고, 그보다 조금 늦게 지휘자의 길을 함께 걷고 있다. 길고 고된 길일 지라도 김선욱은 묵묵히 걸어갈 생각이다. 그는 “자리를 잡는 데엔 시간이 걸리겠지만, 조급하지 않다”고 했다. ‘스타 피아니스트’로 살아왔지만, 음악가로서 꾸준한 연주 기회를 가진다는 것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이제 막 시작한 ‘지휘자의 길’은 더 어렵다. 그가 존경하는 지휘자 정명훈도 “시간이 걸린다”는 조언을 해줬다. “엄청난 장기전이에요. 그게 음악가의 길이라고 생각하고요.”
물론 “지휘와 피아노를 병행하며 매순간 한계에 부딪힌다”. “늘 스스로의 한계와 싸우며, 주어진 것에 후회 없을 정도로 하고 있어요. 어릴 때부터 너무나 좋아하던 것을 지금까지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꿈을 이룬 것이어서, 그 과정이 별로 힘들진 않아요.”
구원투수로 나서는 ‘합창’은 김선욱의 음악여정에 또 하나의 ‘결정적 순간’이 될지도 모른다. 피아노라는 소우주를 건너 지휘라는 큰 우주로 나서는 김선욱의 항해는 이제 시작이다. 그는 “지금은 지휘에 인생을 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했다.
“무대의 조명이 켜지는 순간부터 음악은 시작된다고 생각해요. 하얀 종이 위에 검정 잉크로 채운 악보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저의 몫이에요. 결국 음악가는 자기가 어떤 음악을 가지고 있는 지가 제일 중요해요. 음이 끝나고 잔향이 사라질 때까지 제가 추구한 방향으로, 한 호흡으로 음악을 만들어 가고 있어요. 평가는 어떻든 중요하지 않아요.”
고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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