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향과 6년 그리고 ‘마지막 시즌’

잘하는 곡·장르에 집중하는 스타일

슈트라우스·라벨 부산시향 시그니처로

국립국악관현악 단골지휘 독특한 길

5회째 맞는 롯데콘서트홀 송년음악회

왁킹 댄서 립제이·DJ 하임과 파격무대

지휘자 최수열의 길은 독창적이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 위에 최수열의 정체성이 있다. [롯데문화재단 제공]
지휘자 최수열의 길은 독창적이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 위에 최수열의 정체성이 있다. [롯데문화재단 제공]

지휘자 최수열(43)의 가방은 조금 특이하다. 클래식 음악의 악보를 넣기엔 제법 크다. 가방이 두 개가 붙은 것처럼 만듦새도 특이하다. “낙원상가에서 직접 제작”한 가방이다. 클래식 악보보다 조금 더 큰 현대음악 악보까지 담기 위해서다. 이 가방은 최수열이 걸어가고 있는 현재이기도 하다.

올해로 6년째 이끌고 있는 부산시립교향악단의 창단 60주년 연주회(서울 롯데콘서트홀)가 지난달 열렸다. 척박한 항구도시에서 꽃 피운 악단의 역사를 축하하는 ‘회갑연’의 선곡은 과감했다. 진은숙 바이올린 협주곡 1번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Op.30’. 최수열과 함께 해온 부산시향의 6년을 함축적으로 보여준 자리였다.

“전 모든 것을 다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요. 어떤 곡이나 장르에 특화된 사람이 되는 게 목표예요.”

동시대 지휘자 중 현대음악을 유달리 많이 연주하는 지휘자. 때문에 최수열을 말할 땐 ‘현대음악’이 빠지지 않는다. 누군가에겐 도전이나, 그에겐 일상이다. 최근 서울 잠실 롯데콘서트홀에서 만난 최수열은 “모험적으로 하는 것을 가리지 않는다”며 눈을 빛냈다.

▶도전·모험 시도하며 찾은 차별점...‘돌파구’에서 ‘시그니처’로=지휘자 최수열의 길은 독창적이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 위에 최수열의 정체성이 있다.

“지휘자들 중엔 세상의 모든 곡을 지휘해보겠다고 마음 먹는 사람도 있지만, 전 그런 쪽은 아니에요. 내가 잘하는 것을 찾아내 그것만 하다 죽겠어, 이런 쪽이에요. 그래서 제가 주력하는 분야가 있고, 잘하는 것이 몇 개가 있어요.”

특장점이 있지만, 음악의 폭도 넓다. 고전, 낭만 등 시대를 아우른다. 거기에 ‘비장의 아이템’이 더해지니 전력이 강화됐다. 현대음악은 물론 서양음악 지휘자로는 찾아보기 힘든 국립국악관현악단의 ‘단골 지휘자’다. 국악관현악은 “국악이 아닌 새롭게 창작된 현대음악의 한 갈래”로 대하고 있다.

현대음악을 많이 다루게 된 것이 굳이 “좋아서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일종의 돌파구이자 탈출구였어요.” 무대에 설 기회가 주어지지 않던 시절, 작곡과 학생들의 작품을 통해 지휘의 기회를 얻었다. 그것이 계기가 돼 ‘프로의 길’로 접어들었다.

“현대음악을 많이 하게 되면서, 현대음악만 연주하는 전문가가 돼서는 행복할 수 없다는 걸 느끼게 됐어요. 현대음악만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 입맛에 맞는 현대음악을 골라 해야 한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된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작곡가”, “해야만 하는 가치있는 작곡가”, “동시대에 호흡하는 작곡가”로 연주 기준을 세우고, 그만의 레퍼토리를 짜나가기 시작했다. “문화재를 대하는 마음으로 연주하는 윤이상”, “한국에도 소개하고 싶은 진은숙”, “함께 만들어나가는 김택수, 신동훈”과 같은 작곡가도 그의 중요한 리스트다.

새로운 시도에도 주저함이 없다. 두려움 없는 모험엔 경계를 넘나든 협업도 다양하다. 2017년 시작해 올해로 다섯 번째 이어가고 있는 롯데콘서트홀 송년음악회(12월31일)가 대표적이다. 그는 이번 송년음악회에선 왁킹 댄서 립제이, 탭댄서 오민수, DJ 하임까지 조합한 파격적인 무대를 꾸민다.

“송년음악회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프로그램이에요. 뭘 해도 잘 팔리는 아이템인데, 어디에서나 하는 방식은 슬슬 지겨워지더라고요. 올해는 식상함에서 벗어나 조금은 과감하게 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어요.”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클래식 음악이 화려한 조명 아래 일렉트로닉과 어우러지며 춤바람이 난다. 송년음악회 역사상 가장 파격적인 자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최수열은 “어릴 땐 DJ가 꿈이었다”며 “무대에선 상상속에서 춤을 추며 리듬을 타게 될 것 같다”며 웃었다.

▶소통하는 지휘자...부산시향, 6년간의 변화=부산시향의 연주회 포스터엔 지휘자의 얼굴이 없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언제나 ‘센터’인데, 최수열이 이끄는 부산시향에선 관례가 깨졌다. 공연 홍보물마다 그의 얼굴과 이름은 ‘최수열을 찾아라!’ 수준이다. 지휘자의 권위는 내려놓고, 포디엄 아래에서 소통한다.

“어차피 지휘자는 드러나는 사람이기에 굳이 1순위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지휘자는 이기적인 직업이에요. 자신의 해석에 단원들이 따라오고, 혼자 박수를 다 받고 있으니, 더 나설 이유는 없다는 생각이었어요.”

서른 여덟이던 30대 후반 취임한 그는 새로운 시대가 불러온 새로운 세대의 지휘자다. 최수열은 “학생 때부터 지휘자는 권위적으로 군림하면 안 된다는 강박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지휘자도 음악가 중 한 사람이고, 다만 역할을 리드하는 사람일 뿐이에요. 이제는 오케스트라가 원하는 지휘자 상이 달라졌어요. 소통하는 지휘자가 지금 시대에 맞는 방향인 것 같아요.”

지시보다는 소통과 대화로 악단을 이끌었다. 질문하고 제안하는 부산시향의 문화도 만들어갔다. 물론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과정에서 나이 지긋한 단원들은 젊은 지휘자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우리의 악단을 지키고 성장시켜야 한다”는 애사심이 이들간의 시너지를 만들었다.

지난 6년 부산시향은 최수열과 함께 크고 작은 변화를 만들었다. 악단 내의 세대교체가 이뤄졌고, 관객층은 넓어졌다. 오케스트라의 체계를 세우기 위해 외형도 다졌다. 이른바 시즌제(연간 프로그램)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부산시향은 오랜 역사의 악단이었지만, 틀이 잘 갖춰지진 않았어요. 대다수 지역 오케스트라가 그렇듯 부산시향 역시 1년 계획을 세우진 않았죠.” 2018년 연간 프로그램북을 발표한 부산시향의 시도는 지역 오케스트라로 확장됐다. 악단의 체계를 정립하는 과정이 ‘새로운 상식’으로 자리한 것이다.

음악적 변화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취임 당시 천명한 “국내 악단 최초 슈트라우스 교향시 완주” 계획은 2년 2개월 만에 마무리됐다. 이를 통해 슈트라우스는 부산시향의 시그니처가 됐다. 최수열이 “죽을 때까지 연주하려는 작곡가” 중 몇몇을 부산시향에 입혔다. 라벨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최수열의 마지막 연주 역시 슈트라우스의 ‘영웅의 생애’(2023년 12월 14일)다.

“어느 악단이나 각자가 가진 개성이 중요해요. 중요한 것은 그 오케스트라가 가지고 있는 DNA가 뭔지 파악하고, 거기에 맞는 옷을 잘 입히는 거예요. 악단만의 개성을 만들어주는 것이 지휘자의 몫이죠. 라벨이나 슈트라우스는 옷으로 따지면 굉장히 화려해요. 그 화려함이 호방한 부산시향에 잘 어울려요.”

이젠 마지막 1년이 남았다. ‘마지막 시즌’은 오히려 “힘을 빼고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다음 지휘자를 위해서다.

“그래야 새로운 사람이 와서 출발할 때 부산시향의 색깔을 지우지 않고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 부산시향의 전성기는 제 다음이 됐으면 좋겠어요. 언제나 지휘자보단 악단이 중요하니까요. 부산시향과 아름다운 마무리를 꿈꿔요. 아직 정해진 건 없지만, 제가 필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에 가는 것이 이후의 목표예요.”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