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활동 중단, 그 이면엔

숙성 허락않는 아이돌 시스템

지독한 경쟁·속도전·몰개성화

성공신화 이면에 쌓이는 피로

연습생 숨만 쉬어도 돈 나간다

막대한 투자 비용회수 매달려

변화와 개선의 트리거 삼아야

숨이 차도 앞만 보고 내달려야 하는…K팝 ‘씁쓸한 자화상’
보아를 비롯해 1세대 그룹부터 3세대 방탄소년단, 4세대 투모로우바이투게더, 에스파 등에 이르기까지 K팝 아이돌 시스템은 지금의 K팝 성공신화를 이끈 독특하고 효율적인 시스템이다. 그러나 내부에선 통제된 생활과 혹독한 과정 등으로 인해 개인의 소모, 지나친 경쟁, 몰개성 등 각종 부작용을 호소한다. 사진은 블랙핑크(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오마이걸,, 트와이스, 방탄소년단. [YG·JYP·빅히트·WM엔터 제공]

“K팝과 아이돌 시스템 자체가 사람을 숙성하게 놔두지 않는 것 같아요. 10년 동안 방탄소년단으로 물리적 스케줄을 하다보니 내가 숙성이 되지 않더라고요.” (RM)

1세대 H.O.T.부터 2세대 소녀시대·빅뱅, 3세대 방탄소년단(BTS), 4세대 에스파에 이르기까지…. K팝 성장과 영광의 모든 순간을 만든 ‘K팝 아이돌 시스템’이 다시 한 번 점검 대상이 됐다. 지독한 경쟁, 소모와 속도전, 몰개성화 등 K팝 시스템의 병폐가 노출된 것이다. “K팝 업계를 통틀어 가장 모범사례”(박희아 대중음악평론가)로 꼽히는 RM의 입을 통해 이런 점이 나온 것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K팝 성공신화 이끈 통합형 시스템…소모전·몰개성 부작용 노출=한국을 넘어 아시아와 유럽으로, 팝 음악 시장의 본토인 영미 지역까지 뻗어나간 K팝은 ‘3대 기획사’로 불려온 SM·JYP·YG엔터테인먼트가 구축한 독창적인 시스템 안에서 성장했다. 1990년대 이전 주먹구구식으로 음악을 내놓던 시절과 달리 K팝의 등장과 함께 체계적인 비즈니스 모델이 만들어졌다. 일종의 ‘인재 육성’ 시스템이다. 캐스팅, 연습생의 트레이닝, 콘텐츠 제작을 위한 프로듀싱, 홍보부터 유통까지 이어지는 마케팅 등 전 과정을 K팝 시스템으로 구축했다. SM엔터테인먼트가 일본 아이돌 육성 시스템에서 벤치마킹해 한국에 맞게 수십년간 진화한 시스템으로, 만 열세 살에 데뷔한 ‘아시아의 별’ 보아부터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러한 효율적인 ‘통합형 시스템’은 음악, 안무, 무대, 의상 등 내적·외적의 통일성을 갖춘 완벽한 콘텐츠를 생산해냈다.

하지만 소위 ‘내부 구성원’, 즉 가수들의 고충은 상당하다. 오랜 시간 ‘통제된 생활’과 혹독한 연습과정, 끊임없는 밤샘 등의 강행군이 이어진다.

해외 음악시장과 비교해도 K팝 스타들은 전반적으로 ‘업무 과다’에 시달린다. 이규탁 한국조지메이슨대 교수는 “음반 한 장을 발매하는 데에는 여러 이해와 시간, 노력이 필요하다”라며 “K팝의 경우 매 앨범마다 콘셉트가 따로 있고, 음악, 안무, 무대 등 모든 콘셉트가 높은 완성도를 요구하는데 해외와 달리 K팝은 싱글, EP 등 앨범이 나오는 주기가 유난히 짧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스스로도 고갈되고, 소진되는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엄격한 시스템 안에서 통제된 생활을 하다 보니 아티스트 각자의 개성과 가치보다는 ‘원팀’을 위한 가치에 방점을 둘 수 밖에 없다. 그룹 내의 멤버들에게서 몰개성화에 대해 아쉬움과 불만이 나오는 지점이다. 방탄소년단 맏형 진 역시 “그룹 활동을 하다 보니 기계가 돼 버린 느낌”이라며 “내 취미도 있고 하고 싶은 일도 있다”고 말했다.

이규탁 교수는 “K팝은 하나의 정해진 콘셉트 안에서 음악, 춤, 패션 양식을 통일하는 커다란 이미지를 확립하고 있어, 멤버들마다 존재하는 각자의 개성과 다양한 취향을 반영하는 것이 어렵다”고 짚었다.

▶막대한 투자·성공 위한 채찍질… K팝 시스템은 ‘한국 사회 자화상’=부작용의 원인은 결국 내부에 있다. 사실 K팝 아이돌 그룹을 육성하는 것은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일이다 성공 여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한 팀을 데뷔시키는 비용은 해마다 늘어난다. 업계 관계자들은 “연습생들은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간다”고 토로한다. 투자는 하지만, 모래성 같은 산업 안에서 과정은 혹독해진다. 옥석을 가린다는 명목으로 ‘월말평가’ 등의 채점방식과 과도한 경쟁을 거친다. “K팝에 요구하는 완벽성을 충족”(이규탁 교수)하려다 보니 연습생 기간도 길어지게 된다. 대신 지원과 투자는 강력하다. 이 과정을 거친 이후 목표는 빠른 성공과 투자비용 회수다.

정민재 평론가는 “가요계는 7년의 표준계약으로 시작하는 만큼 이 기간 동안 최대한 빨리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많은 활동을 통해 이익을 남겨야 한다는 인식이 바탕하고 있다. 그렇기에 일 년 동안 새 앨범을 2~3장씩 발매하는 너무나 힘든 활동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업계에선 최정상에 오른 톱스타의 고백을 통해 드러난 K팝 시스템의 ‘불편한 진실’이 향후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본다.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는 “K팝을 지켜내는 것이 가수 개인이냐 시스템이냐를 두고 다양한 목소리와 고민이 나오고 있는 시기”라고 했다.

물론 시스템을 뜯어 고치기란 쉽지 않다. 과거부터 이어진 이 시스템이 지금의 K팝을 일궜기 때문이다. 박희아 대중음악평론가는 “이러한 시스템 자체가 퀄리티 높은 음악과 퍼포먼스를 만들어냈고, 그것이 하나의 문화로 받아들여져 일본으로 역수출이 된 만큼 시스템의 공과가 극명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정상 스타의 외침은 더 큰 메아리가 되고, K팝 시스템의 개선과 변혁의 트리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속도전과 경쟁 체제, 이로 인한 소모와 고갈 등 각종 문제를 안고 있는 K팝 시스템은 ‘한국 사회의 자화상’이다. 고도성장을 겪어온 우리 사회가 이면에서 다양한 부작용을 노출한 것처럼 K팝 산업 역시 그 모습을 닮아 있다.

정민재 평론가는 “한국 사회의 모든 분야가 그렇듯 쉬지 않고 결과를 내는 것에 몰두하다 보니 어느 순간 뇌관이 터지는 것과 마찬가지다”며 “K팝 역시 산업적, 음악적으로 궤도에 올라왔고, 성공에 경도돼 속도전에 몰두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K팝 역시 템포를 낮추며 완성도와 뮤지션의 복지를 돌아보고, 경쟁 내신 조금은 느린 호흡으로 음악을 위한 산업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승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