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마 덮친 ‘청량리 청과시장’ 현장가보니
전통시장 67개 점포 중 20여곳 숯덩이로
추석 앞두고 물건 대량 구입 피해 눈덩이
예상치 못한 화재에 상인들 잇단 한숨만
화재 당시 스프링클러 작동 안 해
동대문구청 “의무 설치 대상 아니다”
“우리 통닭 가게가 저 안에 타버렸어.”
폴리스라인 바깥 쪽에 앉아 있던 60대 명모씨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이 같이 말했다. 지나가던 상인들이 가게 탔냐는 물음에 그는 “홀랑 타 버렸다, 2000만원은 손해날 것 같다”고 답했다.
화재를 겪은 상인들은 “추석 대목에 과일도 다 날린 데다 장사를 못해 큰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지난 21일 오전 4시32분께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청과물시장 2번 출입구 40m 안쪽에서 시작된 불길은 전통시장 67개 점포 중 9개, 청과물 시장 150여 개 점포 중 10개, 과일 냉동창고 1개 등 총 20개 점포를 태우고 오전 11시53분께 완진됐다. 목격자에 따르면 이날 오전 4시10분께부터 연기 냄새가 나기 시작해 4시 30분께 불길이 일었다.
같은 날 오후 3시께 청량리전통시장과 청량리청과물시장의 출입 통제가 일부 풀리고 상인들은 자신의 가게를 찾아가 과일을 들어내고 챙기기에 여념 없었다. 상자를 나르는 지게차와 소방관들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들의 오가는 발 밑으로 겉이 검게 그을린 귤들이 으깨져 젖은 바닥에 나뒹굴었다. 청량리전통시장 통닭 골목과 등을 맞대고 있는 과일가게 9곳과 냉동창고 중 피해가 심한 일부 점포는 천장이 주저 앉아 하늘이 훤히 보였다.
화재가 난 창고 관리인인 40대 정모씨는 “창고 안에서 잠을 자다 불이 나 겨우 빠져나왔다”고 했다. 주변 상인들은 “10분만 늦게 나왔더라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그의 안부를 물었다. 해당 창고는 과일 가게 10여 개가 세를 내 공동으로 사용하는 곳이다. 화재가 나지 않은 일부 과일 가게 상인들도 하루 아침에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 상당의 과일을 잃었다. 정씨는 “가게마다 품목과 가격이 다 다르지만 과일을 보관하던 상인들도 최소 2000만원씩은 손해봤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화재로 가게가 타 버린 상인 홍모(55)씨는 “창고 안에 산더미 같이 과일을 쌓아놨는데 가게고 창고고 전부 타 무너져 들어갈 수가 없는 상황이라 과일은 손도 못 댔다”며 “2500만~2600만원 치는 날린 셈이다. 올해 사과 단가도 유독 비싸 한 짝에 18만~19만원씩 했다”고 말했다. 그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은 견뎌 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니까”라며 말끝을 흐렸다.
또다른 피해 상인 40대 김모씨는 “천장이 폭삭 주저앉아 밤새 사과 900궤짝이 불타 버렸다. 올해 과일은 예년보다 곱절은 비쌌다”며 “우리 가게만 해도 한 1억원은 손해 본 셈인데 다른 가게들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연신 보험사에 전화를 걸고 가게를 들여다봤다. 홍씨 역시 “화재 피해를 입은 가게들은 대부분 목조 건물이라 보험이 안 되고, 되더라도 보험료가 5배 가량은 비싼 셈이라 가입 된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불이 난 가게 맞은편 상인들은 “우리 가게는 다행히 과일이 타지는 않았지만 골목이 이렇게 돼서 당장 장사를 못하니 어떡하냐, 추석 열흘 남은 지금이 대목”이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이들은 “45년간 이 시장 골목에서 장사하며 이렇게 크게 불이 난 건 처음”, “우리 골목은 아니더라도 다른 골목에서는 종종 불이 났었다”는 이야기들을 이어 갔다.
전통시장이 화재에 취약하다는 지적은 매번 반복돼 왔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김형동(국민의힘) 의원이 이날 소방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전통시장 화재는 92건, 재산피해액은 약 1279억원에 달한다. 바로 지난해에도 울산농수산물도매시장에서 설을 앞두고 새벽에 화재가 발생해 상인들이 피해를 입었다.
소방당국에 따르면 화재 당시 경보는 울렸으나 스프링클러는 울리지 않았다. 동대문구청 측은 “화재가 난 가게들은 무허가도 있고, 스프링클러 의무 설치 대상이 아니었다”며 “화재를 수습하고 원인이 밝혀진 이후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