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 자고 나오면 500만원 이상 청구된다. 치료비가 4만달러 나온 사람도 있다. 치료 후 매달 500달러씩 3~4년 갚아야 할 상황이다.” 미국 뉴욕 이야기다. 세계 최강국의 민낯을 본다.
한국이 더 낫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도 ‘신천지라는 약한 고리’를 경험하지 않았는가. 개인의 결핍이 사회의 결핍이다.
코로나19 감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의사, 간호사, 자원봉사자들이 자신들의 건강과 영혼을 쏟아부으며 적극적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교회는 현장예배를 인터넷예배로 대신하고, 국민은 ‘사회적 거리두기’로 또 다른 ‘이웃사랑’을 실천 중이다.
코로나19 감염병이 퍼진 지 3개월, 원시적으로 보이는 손씻기와 마스크 쓰기가 가장 확실한 예방법이 됐다. 가끔 목이 따끔거리거나 가슴이 아프면 ‘혹시 코로나에 감염됐나’ 해서 오만 걱정이 앞선다. 아내, 두 딸, 직장동료, 직장폐쇄…, 생각이 꼬리를 물다보면 잠을 달아나고 한동안 뒤척이기 일쑤다. 불면의 밤.
‘코로나 이후’ 우리 삶의 방식은 달라질 것이다. 주거 형태도 바뀔 것이다. 재택근무나 자가격리 형태에 맞는 주택이 주류로 부상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전용 88㎡ 아파트를 3층이나 4층 형태로 위로 짓는 방식이다. 이미 이런 주거 형태가 선을 보이고 있다.
종교학자 배철현은 ‘모두가 마스크 쓰고 있는 이 시기를 내 이웃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경청과 반성의 시간으로 삼자’고 말한다. 내 말을 줄이고 타자에 다가서기. 혹자는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있는데 누가 누구의 목소리를 들으란 말이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내 이웃은 꼭 내 밖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내 안의 타자, 낯설고 심지어 섬뜩하기까지 한 내 안의 이웃에 잠시 귀 기울여 보자. ‘돌아보면 모든 게 부끄럽다’는 말이 내 살에 문신처럼 새겨진다.
일부에선 여전히 한국이 2월 중순 ‘중국발 입국 금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염 확산을 자초했다고 끈질기게 주장한다. 과연 그런 주장이 수치로 검증될 수 있는 것인지 기자는 알지 못한다. 강박적으로 ‘그것’만 제거했다면 우리에게 이런 불행은 없었을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서는 안 된다. 차단, 봉쇄를 사유하는 것은 쉽다. 중국처럼 고속도로에 덤프트럭으로 흙을 쏟아붓고 지하철엔 사람 하나 없는 텅 빈 사회를 원하는가? 중국의 작가 옌렌커는 “코로나 이후 중국인들의 마음은 철저하게 붕괴되고 분열됐다. 무수한 파편으로 조각난 접시를 어떻게 이어 붙일 수 있을지 알 수 없다”고 걱정한다. 한국은? 우리도 코로나 이후 국민의 마음을 어떻게 추스를지 지금부터 고민해야 한다. 힘들어도 떨어져서 함께하기, 밖으로 껴안고 가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고 스스로를 끌어내 늪으로부터 빠져나오는 뮌히하우젠 남작과 같이 결코 마술적 영역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기억은 과거 기록의 저장소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기억은 우리의 현재 활동이 미래에 어떻게 전개될 수 있을지에 관한 시나리오들을 이미-낮꿈부터 밤꿈까지, 자유롭다고 할 만한 모든 순간에-구상한다. 우리의 기억은 경험된 과거의 요소들을 재료로 삼아 가능한 미래 예측들을 산출하는 미래 실험실이다.” 한나 모니어와 마르틴 게스만이 쓴 ‘기억은 미래를 향한다’에 나오는 구절은 새겨둘 만하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는 노랫말처럼 봄날은 속절없이 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