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아닌것, 시인 아닌 사람 없는 곳 ‘문림’
탐진강-바다-팔명산 문학소년-소녀 된다
가장 아름다운 작은섬 소등섬 인생샷명소
이순신 상유십이척 대승 준비하는 곳 ‘의향’
보림사, 철불엔 귀천없음이,벽화엔 ‘신곡’이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고려 공예왕후는 의종,명종,신종 등 임금 셋을 낳았다. 참 길게 왕실을 지킨 고려시대 내명부 최고의 인물이다. 공예왕후의 남편인 인종은 왕후를 사랑하고 그녀의 고향도 사랑해, 사랑하는 왕비를 낳고 키운 곳에 ‘길게 흥하라’는 뜻으로 ‘장흥(長興)’이라 이름 붙였다.
장흥은 관동별곡의 벤치마킹 기행문이 된 관서별곡의 백광홍을 낳고, 이청준을 낳고, 한승원-‘맨부커’ 한강 부녀를 낳았다. 문림(文林)이다.
장흥에서 아름다운 풍경은 시(詩)가 되고, 인정 어린 삶은 소설이 되었다. 향토 문인 이동규는 ‘시 아닌 것, 시인 아닌 사람이 없는 곳, 소설 아닌 것, 소설 아닌 사람이 없는 곳’이라고 했다.
‘당신의 이름을 지우려고 문지른 자리에 강(탐진강)이 생겼습니다. 손끝하나 스쳤을 뿐인데 숲이 운다고 합니다.’ 한승원의 후배 이대흠은 장흥의 자연에 가장 애틋한 감성을 입혀, 풍경과 삶을 하나로 묶었다.
장흥에 가면, 풍경과 인정이 문학을 낳고, 여행자 마저 동화되는 두툼한 추억이 만들어진다.
고교생 이청준이 어머니와 말없이 걷던 회진면 신상리 팽나무옆 ‘눈길’이 벌써 다 녹았다. 그 때 남에게 넘어갔던 생가도 돌아왔다. 충무공의 상유십이척(尙有十二隻)의 집결지, 회진 바다가 보이는 밭과 들, 문림(文林)·의향(義鄕)의 장흥은 2020년 우수(雨水) 전인데도 춘흥을 못 이긴 채 연초록으로 물들고 있었다.
집은 팔렸는데, 광주에 유학 간 아들이 온다하니 새 주인한테 머리를 조아려 마치 안 팔린 양, 하루 빌린다. 집에 온 청준은 눈치채고도 내색 않는다. 따뜻한 집밥과 아랫목으로 하룻밤을 지낸 뒤 눈 쌓인 아침, 집 마당을 나서고 어머니가 따른다. 정류장 가는 ‘눈길’가 팽나무에 예쁜 눈꽃도 피었건만, 모자(母子)는 한 시간 남짓 아무 말이 없다. 아들 보내고 눈길에 새겨진 발자국 흠집날까 조심스럽게 되밟아 보지만,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에 녹고 만다. 이청준의 소설, ‘눈길’의 실제상황이다.
팔렸던 집은 장흥군이 사서, 노변정담하던 그 화로, 서울대 보낸 형설지공의 호롱볼, 눈길과 서편제가 함께 엮인 단편집 ‘눈길’,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밀양’의 원작 ‘벌레이야기’ 등 이청준으로 가득 채우고, 장독대도 보존했다.
청준이 후배 문인 김석중(장흥별곡문학동인회장)에게 긁적거려준 소설 배경지 지도(map)는 원본 그대로 조형물이 되어 생가를 지키고, 한때 문학소녀, 문학소년이었던 국민과 청년 문학도의 순례길 가이드가 됐다.
신상리 동편 선학동 해변은 ‘선학동 나그네’의 영화버전,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작품 ‘천년학’의 주무대이다. 주홍빛 지붕에 다락방을 높게 올려 2층 모양새인 가옥은 충무공이 12척으로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대승을 기약하던 회진 바다를 내려다 본다. 공지선을 따라 학처럼 그려지는 선학동의 모습이 또렷하다. 근처엔 ‘아제아제 바라아제’의 한승원 생가도 있다.
‘관동별곡’ 정철의 25년 벤치마킹 선배인 ‘관서별곡’의 백광홍을 비롯해, 왜 이곳에 문인들이 많냐고 장흥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산, 강, 바다, 들이 다 좋아서”라는 동문서답이 돌아온다. 이 말은 다가올 춘삼월, 북쪽 가지산, 제암산, 다슬기 사는 탐진강 부터 남쪽 소등섬, 정남진전망대, 선학동까지 둘러본 사람만이 맞장구 칠 수 있다. 시가 절로 나오니, “나도 한때 문학소녀였지”라는 깨알자랑을 공감받을 절호의 기회이다.
단언컨대, 남포마을의 소등(小燈)섬은 우리나라 작은 섬 중 가장 아름답다. 인생샷 촬영지이고, 이청준의 동명 소설을 임권택 감독이 영화로 만든 ‘축제’ 배경지이다. 썰물 때 길이 서서히 드러날때 오른쪽으로 휘어진 소등섬 가는 ‘모세의 길’을 걸으면 물 위를 걷는 듯한 신비감까지 자아낸다.
여인들이 소등(호롱불)을 켜놓고 어부의 무사귀환을 빌던 곳. 경주의 왕릉 보다 조금 작은데, 바다 한복판에 소나무가 운치있게 군락을 이뤘다.
서울 광화문과 경도가 같아 정남진 표지석이 있는 소등섬은 앞으로 남쪽 관산읍의 정남진 전망대와 함께 희망, 사랑, 안녕을 상징하는 관광 테마파크의 중심이 될 전망이다. 승강기 길이(40여m)에 해발을 합하면 100m에 육박하는 높이에서 다도해를 내려다 보는 정남진전망대는 서부 다도해의 해양 랜드마크이다. 두바이에 액자 같은 사각 프레임이 있다면, 이곳엔 동그라미 정남진 프레임이 있다.
소등섬 북쪽으로 10여분만 차를 달리면, 한승원 문학산책로가 있는 여닫이 해변을 만난다. 썰물 때 갯벌 쪽으로 나가보면 해넘이 풍경이 일품이다. 넘어가는 석양의 반영은 바닷물에 닿았다 조각배 돛대에 스친 뒤 갯벌을 훑어, 주홍 물감 번지듯 아련하게 내 마음에 파고든다.
‘조계종의 종갓집’ 보림사엔 국보로 지정된 석탑과 석등, 철조비로자나불(철불)좌상, 보물로 지정된 동부도, 서부도, 보조선사 창성탑 및 창성탑비 등이 있다. 1200년 가까이된 창성탑의 부조가 정교하고, 비석받침의 머리가 낙타라서 이채롭다.
9세기 철불(국보 제117호)엔 장흥 다운 인정이 담겨 있다. 다른 절이 금으로 불상을 만들 때 서민들의 세간살이 재료인 철(鐵)로 만든 마음은 황금색 치장의 귀족불교를 거부하고 귀천없는 흰색으로만 전각을 지은 치앙라이 백색사원의 정신과 같다. 성자의 벽화 대신 단테의 신곡 처럼 8단계 지옥을 그려넣은 점도 남 다르다.
‘팔명산’을 빼놓을 수 없다. 백두대간 부럽지 않게 해발 500m 넘는 산이 여덟 곳이나 된다. 이 8개의 명산을 정종선 군수가 팔명산이라 불렀더니, 팔명산 해발 합이 5060m라서 2040은 물론 5060들에게도 사랑받는다는 화답이 돌아온다.
사자산에 오르니 바다, 강, 팔명산 첩첩능선, 전통시장, 새싹돋는 밭의 모습이 발 아래 펼쳐지고 발효녹차 전통을 이어가는 기산마을 위로 독수리 한쌍이 보디가드 처럼 유유히 나른다.
옥황상제의 관을 닮고, 문림의 상징 책바위도 끼고 있는 천관산은 호남 5대명산이다. 제암산은 3월 철쭉 풍경이 국내 으뜸이고, 힐링 체험센터 편백숲 우드랜드를 끼고 있는 억불산은 편백의 건강식생으로 약산(藥山)으로 통한다. 탐진강의 발원지와 가까운 국사봉와 부용산은 위엄을, 고려산성이 있던 수인산은 호국을 상징하고, 1000년 고찰이 지키는 가지산은 사계절 푸른 비자림 사이로 홍매가 피어났다.
눈길이 녹았으니, 이제는 꽃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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