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들 옆테이블엔 젊은 커플 골목골목 가맥집엔 직장인 왁자지껄 커피 한잔 값에 생맥주+간단한 안주
제조업·소상공인 얽혀 변화 늦춰진 곳 세월의 두께 기존상권에 젊은 가게 조화 상인들 “젊은 사람들 오니 활기 넘쳐”
미로처럼 얼기설기 얽혀있는 골목길. 수 십년간 한자리를 지켜온 낡은 인쇄소, 공구가게와 조명가게. 탱크까지 만들 수 있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을 정도로 ‘없는 게 없다’는 을지로는 오랜 기간 도심 낙후지역으로 숨죽였다.
멋스러움과 세련미와는 거리가 먼 곳으로만 여겨졌던 을지로가 ‘핫’(hot)하다 못해 ‘힙’(hip)해지고 있다. 그래서 ‘힙지로’로 불리는 이곳에선 연신 “와 너무 핫한데?”를 외치는 젊은이들과, 삼삼오오 술잔을 기울이며 “어이구 어이구 많이 변했네”하며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중장년층들이 오늘도 신(新)을지로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경험하고 있다.
▶젊음과 노년의 교차…혼종의 노포=지난 18일 오후 4시께 찾은 을지로3가는 중절모 쓴 할아버지부터 기말고사가 끝난 대학생까지 한데 ‘왁자지껄’ 어우러진 모습이 ‘흥’ 그 자체였다.
유명한 노가리 골목엔 5시부터 야외 장이 깔리기 시작했다. 400m에 달하는 ㄷ자 형태의 구역이 이 골목의 핵심이다. 거리를 따라 빽빽이 놓인 테이블은 각양각색 사람들로 금세 왁자지껄했다. 노가리 하나(1000원)에 생맥주 한잔(3500원)이면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한잔 값 정도다. 끊임없이 몰려드는 인파에 사람들의 눈이 마주쳤고, 일부는 연신 휴대폰을 들어 영상을 찍기 바빴다. 대학생 무리 옆엔 60대 할아버지가, 가족 단위 주민들 옆엔 직장인들이 섞여 축제의 장을 연상시켰다.
노가리 골목의 만선호프 강주영(63) 사장은 “저녁 7시 반이 피크타임으로 그땐 사람이 다닐 수 없을 정도”라며 “3년 전만 해도 50~70대가 70%였는데 이젠 20~30대 젊은 사람들이 90%는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서서히 어두워진 골목에는 ‘흥’이 넘쳤다. 대학생 정모 씨(24)는 “소맥 10잔은 넘게 마셨는데 마지막 대학 시험이 끝나서 친구들과 달렸다. 힙 충전하고 싶을 때마다 을지로를 온다”고 했다.
40년 전부터 노가리 골목을 찾았다는 김모 씨(67)는 “힙지로란 말은 들어본 적 없지만 몇 년 전부터 젊은 사람들이 많이 온 건 안다”며 “젊은 사람들 많이 오고 단골 가게 장사 잘되면 좋지 않나”며 호탕하게 웃었다.
흥이 넘치지만 한켠에는 아쉬움도 공존하고 있었다. 15년 째 을지로를 오간 직장인 김성호(52) 씨는 “젊은 활기가 돌고 상권이 살아나는 건 좋지만 조용한 사랑방처럼 중장년층이 갖고 있던 추억과 향수가 변모하는 것 같다”고 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세대가 섞여 든 힙지로 현상에는 을지로의 역사성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1970년대 제조 산업의 중심지였던 이후 쇠퇴의 길을 걸었지만, 덕분에 을지로엔 상권이나 임대료를 좌우하는 손바뀜이 적었다. 인쇄소와 자재상 등 생업이 얽힌 소상공인 생태계도 을지로의 변화를 늦췄다. 그렇게 쌓인 세월은 다양한 세대가 함께하는 지금의 힙지로로 이어지고 있다.
권대중 명지대 부동산대학원 교수는 “인쇄소와 철공소 등 기존 상권이 살아있는 형태로 우리나라에서 을지로처럼 신구(新舊)가 잘 조화된 사례는 흔치 않다”며 “1970년대 문화와 2019년의 문화 트렌드가 교차되고 발전하는 곳”이라고 분석했다.
▶켜켜이 쌓인 스토리…을지로의 2막을 여는 ‘노포’= 낮에는 슈퍼, 밤에는 적은 돈으로 맥주와 함께 기본안주를 곁들일 수 있는 가성비로 인기를 끌고 있다는 가맥집의 원조격인 ‘서울식품’. 1970년대 세트장 같은 건물엔 생맥주, 라면, 음료수를 판다는 노란 간판이 무심히 걸려 있었다. 영락없는 옛날 슈퍼라 여기는 찰나, 가게 앞으론 대기줄이 들어섰다. 오후 5시가 갓 넘은 시간이었다.
줄을 서 기다리는 젊은 방문객들은 을지로 노포가 주는 세월의 이질감을 즐긴다고 했다. 친구와 함께 온 차보경(29) 씨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옛 가게나 주물, 공구상가를 속속들이 구경할 일은 힙지로 전엔 없었다”며 “홍대는 세월이 흘러도 추억이나 스토리가 켜켜이 쌓이는 느낌이 없지 않나. 늘 바뀌고 늘 더 새로워져야 하는 공간이다. 그런데 을지로는 세월이랑 공존하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도수진(28) 씨도 “막상 와보니 다양한 연령대가 보인다. 힙지로가 원래 연세 있는 분들이 찾던 곳이지 않느냐”고 거들었다.
세월이 주는 이질감은 ‘뉴트로’ 트렌드와 맞물려 새로운 스토리가 되고 있는 셈이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지금의 젊은 층은 IT 확산과 맞물린 세대로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정보를 받아들인다”며 “과거의 것도 이들에겐 새로움으로 다가오며, 뉴트로 트렌드는 한 세대의 문화를 알게 되고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더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유정 기자, 김민지ㆍ김용재 인턴기자/ku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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