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년 만의 연극 복귀작 ‘헤다 가블러’

다른 배우와 발성 달라 ‘현타’ 크게 와

“대사 잊는 꿈 꾸고 엉엉 울다 깨기도”

연극 ‘헤다 가블러’로 무대에 돌아온 배우 이영애 [LG아트센터 제공]
연극 ‘헤다 가블러’로 무대에 돌아온 배우 이영애 [LG아트센터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인생에서 한 번쯤 한 사람의 운명을 조종해 보고 싶었어.” (‘헤다 가블러’ 헤다의 대사 중)

단어 사이엔 휴지(休止)가 길었다. 예측할 수 없는 순간마다 실린 음절의 강세는 독특한 리듬감을 만들었다. 때론 마침표를 찍듯 단호하게 어미를 닫았고, 때론 공중에 날려버리듯 어미를 삼켰다. 만사가 귀찮은 나른한 상류층 여성이었다가, 괴팍하기 그지없는 공감 무능력자가 됐다. 120년 전에도 지금도 ‘문제적 변종’인 ‘헤다 가블러‘(6월 8일까지·LG아트센터 마곡)가 이영애를 만났다.

생애 첫 연극 ‘짜장면’(김상수 극작, 연출) 이후 32년 만에 무대로 돌아온 이영애는 개막을 앞두고 ‘헤다’ 못잖게 복잡다단한 심경을 전했다.

“처음엔 ‘현타’(‘현실을 깨닫는 순간’을 뜻하는 신조어)가 크게 왔어요. 리허설 후 연습 장면을 녹화한 영상을 보니 다른 배우들과 발성이 너무 다르더라고요. 그렇다고 제 목소리를 갈아엎을 순 없잖아요.”

이제 5번의 공연을 마친 이영애는 그 순간을 떠올리며 아찔한 듯 보였다. 개막 전 수개월의 준비기간을 거쳤지만, 몸이 풀리기까진 시간이 필요했다.

최근 서울 마곡 LG아트센터에서 만난 그는 “연기 지도하는 친구들에게 연락해 발성을 비롯해 연기에 필요한 기술적인 부분에 대해 듣기도 하고, 백지원 배우를 비롯해 함께 하는 역량 있는 배우들이 가르쳐줘서 자신감을 얻고 있다”고 돌아봤다.

헨리크 입센의 희곡 ‘헤다 가블러’는 올 상반기 공연계의 ‘핫이슈’다. 이영애의 연극과 함께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 배우 이혜영의 ‘헤다 가블러’(5월 16일 개막)가 국립극단을 통해 막을 올리며 두 편의 연극을 향한 기대도 높아졌다.

연극 ‘헤다 가블러’로 무대에 돌아온 배우 이영애 [LG아트센터 제공]
연극 ‘헤다 가블러’로 무대에 돌아온 배우 이영애 [LG아트센터 제공]

‘선공’은 이영애다. 수많은 남성의 구애를 받는 아름다운 여성이나 세상만사 지루하기 짝이 없고, 끝없는 결핍과 억압으로 뒤틀려버린 여자의 다층적 내면을 풀어가는 이영애만의 방식엔 36년 차 배우의 내공이 자연스레 묻어난다.

이영애는 “헤다의 심리를 따라가는 것이 답이 없는 수학 문제를 푸는 것처럼 어려웠다”고 말했다. 헤다에 더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 그는 한양대 연극영화과 박사 과정 시절 은사인 ‘입센 권위자’ 김미혜 명예교수에게 강의까지 들으며 캐릭터를 분석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영애가 본 ‘헤다’는 ‘입센 그 자체’였다. 자신에 대한 열등감, 상류층이면서도 상류층에 속할 수 없는 자아적 고민은 헤다와 입센이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시선이다.

1890년 발표한 입센의 ‘헤다 가블러’는 시대가 규정한 여성상을 벗어난 한 사람의 이야기다. 사회의 제약과 억압 속에서 끊임없이 자유와 해방을 갈망했으나, 강요된 구조 안에서 벗어나지 못해 뒤틀려버린 사람이다. 이영애는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헤다의 결핍이 욕망과 질투, 모성에 대한 거부감으로 귀결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연극은 헤다가 6개월의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불과 36시간 동안 벌어지는 일상은 사방에서 헤다의 숨통을 조인다. 무대 한쪽에 놓인 색색깔 풍선이 터지지도 날아가지도 못한 채 자리를 지키는 것처럼 그의 삶은 시한폭탄 같다. 그 일상이 헤다에게도 ‘현타’ 그 자체였다. 죽음을 선택하는 ‘자기파괴’만이 해방과 구원이라 믿었던 헤다의 짧은 생은 짓이겨버린 자기 정체성을 향한 갈구였다.

“헤다는 1 더하기 1은 영이 되기도 하고, 4가 되기도 하는 여자예요.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많지만 악녀로 그리기보단 이해할 수 있는 인물로 그리고자 했어요. 헤다의 삶은 무언가를 찾기 위한 여정이었어요. 저는 그렇게 풀어갔지만, 늘 미지수를 낳는 여자이기에 관객도 함께 풀어가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어요.”

연극 ‘헤다 가블러’로 무대에 돌아온 배우 이영애 [LG아트센터 제공]
연극 ‘헤다 가블러’로 무대에 돌아온 배우 이영애 [LG아트센터 제공]

이영애의 ‘헤다’는 공연 때마다 모두 달랐다. 개막 당일 다소 긴장된 모습을 보였지만, 한 회 한 회 거치며 그만의 헤다를 만들어갔다. 이영애는 공연 전만 해도 “대사를 까먹거나 관객들이 도중에 다 나가버리면서 ‘영애씨, 그렇게 연기하면 안 돼요’라고 말하는 꿈을 꿔 엉엉 울기도 했다”고 말했다.

부담은 있었지만, 이영애는 이영애였다. 처음엔 대사만 잊지 말고 차근차근 매뉴얼대로 해나가는 것이 목표였다지만, 이젠 관객과 소통할 수 있을 정도로 무대에 익숙해졌다.

“어떤 날은 대사를 노래 부르듯이 하고 어떤 날은 쏟아내고, 어떤 땐 화장을 짙게 하고, 어떤 때는 빨간 매니큐어를 바르기도 해요. 오른쪽으로 가야할 걸 왼쪽으로 가보기도 하고, 앞사람을 보고 말하기도 하고요.”

특히 그가 집중한 것은 인물들 간의 ‘관계성’이다. 충동적으로 결혼한 ‘너드’ 타입의 학자 남편 테트만에겐 하대와 경멸, 적당한 남편 대우 정도 하고, 헤다의 갈망을 꿰뚫어 본 테트만의 친구 브라크 판사에겐 한 겹의 가면을 벗고 자기 안의 속살을 연기하듯 꺼내 보인다. 끈질기게 지분대는 남자를 대하는 방식이다. 전 연인 에일레트에겐 자신의 이상을 투영해 조종하려 하는 가스라이팅 대가의 면모를 드러낸다.

헤다의 악마적 속성이 발현되는 사람은 테아다. 옛 연인의 현 뮤즈이면서 자신과 달리 주체적 여성으로서 삶을 선택해 나가는 테아를 향해 쏟아내는 광기는, 타인은 없고 자신의 고통만 남아 더 섬뜩하다. 1300여 석의 대극장 무대임에도 가정부 베르트가 직접 찍는 라이브 영상 덕에 2층 객석에서도 이영애의 눈빛과 떨리는 얼굴 근육까지 볼 수 있다. 그 어떤 보정도 없는 날것 그대로의 영상은 헤다의 일그러진 내면이기도 하다.

연극 ‘헤다 가블러’로 무대에 돌아온 배우 이영애 [LG아트센터 제공]
연극 ‘헤다 가블러’로 무대에 돌아온 배우 이영애 [LG아트센터 제공]

이영애는 “상대에 따라 리듬감, 스피드, 톤 차이에 변화를 주면서 그 안에서 즐길 수 있도록 변주하는 여유를 주고 있다”며 “헤다의 내면을 보려면 나의 눈을 봐야 하는데, 영상이 무대의 단점을 커버할 수 있어 좋았다”고 했다.

헤다를 만나며 무대 위 이영애도 매 순간 해방감을 마주한다. 그는 “내가 어디 가서 눈을 부라리며 ‘다 불태울 거야!’라고 소리치며 카타르시스를 느껴보겠나”며 “몰랐던 나를 끌어내며 희열을 느낀다”고 말했다.

연극을 준비하는 동안 다이어트를 하지 않았는데도 체중이 4㎏이나 줄었다. 그만큼 체력적으로 힘들었던 것. 그래도 재밌단다. 요즘 그는 ‘행복한 스트레스’를 만끽 중이다.

시대에 갇힌 여성 서사로 읽혔던 ‘헤다 가블러’는 2025년의 관객과 만나 ‘오늘의 이야기’로 다시 태어난다. 연극은 여성을 넘어 사회 안에서 무수히 많은 역할을 강요받고 억압당해 자유를 갈망하는 모든 존재를 꺼내왔다. 이영애는 “현대인 누구나 자신도 모르는 욕망, 표출하지 못한 질투와 자아가 많을 것”이라고 했다.

“누구에게나 헤다가 있어요. 그것이 큰 헤다일 수도, 작은 헤다일수도 있죠. 단지 크기만 다를 뿐 누구나 헤다를 가지고 있기에, 이 작품이 폭넓은 이야깃거리를 줄 수 있는 제시적 연극이 됐으면 좋겠어요.”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