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정·김정욱·임순남 등 5명 작가 참여
손 끝에서 펼쳐지는 드로잉의 향연
전시장에는 서로 다른 다섯 명의 작가들이 그린 크고 작은 드로잉이 걸렸다. 자연, 인간, 도시, 일상까지 각기 다른 주제와 연필, 오일파스텔, 잉크 등 각기 다른 재료로 말이다. 그래서 모든 드로잉이 저마다의 이유로 독창적이다. 단순히 그림을 준비하는 밑작업으로서 드로잉을 떠올렸다면 오산이다.
21일 개막한 피비갤러리의 전시 ‘드로잉: 회화의 시작’은 드로잉을 중심으로 독창적인 시각 언어를 펼치는 다섯 작가의 그룹전이다. 샌정, 김정욱, 임순남, 김세은, 윤이도 등이 이번 전시에 참여했다. 최근 디지털 기술과 인공지능(AI)이 미술계에 미치는 영향이 커질수록, 손끝에서 가장 원초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드로잉이 오히려 뜨고 있는 양상이다. 이는 복잡한 기술과 개념을 넘어 창작의 본질적 요소로 돌아가고자 하는 지금 현대 미술의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실제로 종이에 연필과 오일파스텔로 자연의 모습을 선과 색으로 그려내는 샌정 작가의 드로잉에서는 회화의 본질을 꿰뚫고자 하는 시도가 엿보인다. “최근 캔버스 화면을 오랜 시간 관찰하고, 그림을 대하는 스스로의 태도에 집중하고 있다”는 작가는 형상과 색이 아닌, 그 뒤에 깔린 배경에 오롯이 집중했다. 마치 하나의 컬렉션처럼 보이는 7점의 ‘무제’는 각 작품마다 단순한 색상과 추상적인 형태만으로도 생동감을 자아내는 드로잉의 재미를 보여준다.
윤이도 작가는 나무 이쑤시개에 먹물을 묻혀 두터운 장지에 새겨나가는 노동집약적이고 수행적인 드로잉을 완성했다. 그의 이런 작업 과정이 주로 까만 밤의 배경 속에서 형태와 명암을 천천히 드러내는데, 이는 화폭에 담긴 일상의 풍경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특히 그의 작품 ‘부러진 우산조차도 편히 버리지 못하는 사람(A person who cannot comfortably throw away even a broken umbrella)’은 물건에 담긴 의미를 쉽게 내려 놓지 못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그림이다. 부러진 우산이 가지 사이에 걸쳐 있는 모습이 마치 상처나 결핍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한 인간의 성찰적 면모를 닮기도 했다. 이러한 작품 내용이 그의 집요한 작업 방식과 어우러지면서 관람객들은 화폭 앞에서 작가의 명상인 태도를 은연 중 느끼게 된다.
2015년께부터 구체화된 인물을 화폭에 담기 시작한 김정욱 작가의 드로잉은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띤다. 여러 개의 눈, 승려와 같은 형상, 얽히고 설킨 빛의 광선 등 각각의 기호가 영적인 존재를 암시하는 듯 화폭 안에서 부딪히고 연결된다. 신도시에서 자란 김세은 작가는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도시의 거리, 주거 지역, 토목 구조물, 녹지 공간 등을 관찰하며 이를 드로잉으로 표현했다. 특히 공터나 터널, 다리처럼 비어 있는 공간들이 큰 구조물의 사이를 연결하고 주변을 채우며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내는데, 이런 공간들이 단순히 정지된 모습이 아닌 조형적 상상을 자극하는 특별한 영감이 됐다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임순남 작가는 인터넷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셀피’ 사진들에서 포착한 내밀한 표정에 집중해 드로잉으로 그려냈다.
전시는 12월 28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