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드라마 ‘정년이’ 라이벌 허영서 열연
고음 안 나와 8시간씩 연습하다 ‘떡목’
영서와 함께 성장…연기 더 사랑하게 돼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모두가 상상하는 남원의 곱상한 도련님 ‘몽룡의 정석’이었다. 세련된 청색 도포처럼 매끈하게 흘러가는 소리에 단숨에 ‘국극 왕자님’으로 불리게 됐다. 이 장면들을 위해 그는 생애 처음 판소리를 배웠다. 드라마 ‘정년이’(tvN) 속 ‘국극 엘리트’ 신예은이다. 그의 소리 선생님은 ‘동시대 판소리’를 만들어 가는 창작 단체인 입과손스튜디오의 김소진. 깊은 성음과 풍성한 감정 표현이 강점인 김소진의 소리는 신예은이 고스란히 흡수해 그가 연기한 허영서에게 입혀졌다.
“하루에 8시간씩 연습을 했어요. 고음이 잘 나오지 않아, 그 근처에 접근이라도 할 때까진 집에 가지 말자는 생각이었죠.”
‘최고의 소리’를 찾기 위해 산(山)공부를 하다 ‘떡목’이 된 정년이(김태리 분)처럼, 같은 대목을 수없이 반복하는 영서처럼, 신예은도 ‘이상적 소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러다 결국 사달이 났다. 그는 “병원에 갔더니 당분간 연습하지 말라는 진단을 받았다”며 “그래도 연습을 멈출 수가 없어 나중엔 대본 리딩까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고 돌아봤다.
최고 시청률 16.5%(닐슨코리아, 전국 유료가구 기준). 신예은에겐 역대 출연작 중 가장 높은 성적이다. 무사히 ‘완주’를 마친 얼굴이 밝았다. “완벽한 소리꾼, 완벽한 무용수는 아니더라도 아쉬움은 남기지 말자는 마음으로 연습했다”는 그에게선 한 줌의 미련도 찾을 수 없었다.
신예은이 연기한 허영서는 이른바 ‘국극 엘리트’다. 드라마 속 국극 단체인 매란국극단에서 일찌감치 ‘차세대 왕자님’으로 꼽혔다. 그는 “처음부터 허영서가 좋았다”고 했다. 세상은 그를 ‘음악 금수저’로 봤지만, 허영서는 가슴 속에 피어나는 열등감에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사람이다. 정년이의 경쟁자로, 그와 함께 성장과 연대의 드라마를 써내려갔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볼 만한 인물이라고 느꼈어요. 매번 비교를 당하는 사람, 자존감이 낮아 나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 아무리 노력해도 목표치가 보이지 않는 사람, 내가 하는 일을 왜 사랑하는지 모르는 사람…. 영서가 느끼는 감정들은 많은 사람들의 경험, 감정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영서를 만나며 신예은은 배우의 길을 걷는 자신을 돌아봤다. 그는 “영서의 성장과 내 성장이 비슷하다”고 했다. 누구나의 마음 속에 살던 ‘허영서’는 신예은의 안에도 있었다. 그는 스스로에 대해 “자신을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며 “어느 순간 당근보단 채찍을 많이 줬고, 누군가 칭찬을 해줘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더 잘 할 수 있다’고 몰아쳤다”고 말했다.
2018년 웹드라마 ‘에이틴’(A-TEEN)으로 데뷔한 신예은은 어느덧 데뷔 7년차의 배우가 됐다. 그동안 여러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얼굴을 비췄고, 2022년 ‘더 글로리’(넷플릭스)에선 악역 박연진의 어린 시절을 연기하며 존재감을 알렸다. ‘정년이’는 신예은의 또 한 번의 도약을 보여준 작품이다.
“‘노력해서 안 되는게 어딨어, 나는 백만 시간, 천만 시간을 들여서라도 할 거야’라는 영서의 대사가 있어요. 이 대사를 보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전 노력이 재능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처럼 이 대사에 위로받은 사람이 많았을 거예요. 세상의 모든 허영서를 응원하고 싶었어요.”
신예은은 “영서의 성장이 노력으로 얻은 거라 좋았다”고 말한다. 실제 그 역시 ‘국극 에이스’ 영서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스스로를 사랑하고 열심히 하면 다른 건 다 따라온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물론 무엇 하나 쉽게 만들어지진 않았다. 노래만 부르면 얼굴이 빨개지고 긴장이 돼 소속사 직원들 앞에서 ‘사랑가’ 한 자락을 뽑아내기도 했다. “그 땐 소리를 배운지 얼마 안돼 정말 못했어요.(웃음)”
소리만 배운 것이 아니다. 한국무용을 배우며 기본자세는 물론 치마 잡는 법, 겨드랑이를 벌리는 방법 등 A부터 Z까지 갈고 닦았다. 그 기간이 1년이나 된다. 영서가 겪어내는 사건들, 다른 인물과 맺는 관계 속에서 가지는 영서의 감정은 고스란히 신예은의 눈 안에 들어찼다. ‘더 글로리’(넷플릭스)에서 “신이 나면 더 까매지던 눈동자”를 가졌던 어린 연진은 사라지고, 한계를 마주하고 열등감을 극복하려 몸부림치면서도 시기와 질투에 매몰되던 가여운 검은 눈동자가 시청자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내가 과연 ‘정년이처럼 자신있게 즐기며 연기한 순간이 있을까, 나는 영서일까 정년이일까’를 고민해 보기도 했어요. 실제로도 전 영서에 가까워요. 배우로서 영서를 만나면 제 안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얘가 ‘더 글로리’ 연진이었어?‘ 하는 반응이 좋았어요. (웃음)”
전형적으로 보일 지라도 가장 복잡하고, 일상의 모두를 대변하기도 하는 영서를 만나며 신예은은 ‘배우의 마음’을 얻었다고 돌아봤다.
“아직 저만의 연기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영서를 만나며 저 역시 성장하게 됐어요. 영서가 자신의 성장을 통해 국극을 사랑하게 됐다면, 저는 연기를 더 사랑하게 됐어요. 매번은 아니더라도 연기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