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서 사라진 인플레 ‘명목 앵커’…물가·엔화에 중요한 이유 [츠토무 와타나베]
명목 앵커란 무엇인가 화폐 그 자체에는 실질적인 가치가 거의 없다. 화폐의 가치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려면 어떤 방식으로든 일정한 기준점에 묶여 있어야 한다.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기준점을 ‘명목 앵커(nominal anchor)’라고 부른다. 금본위제에서는 화폐의 환율을 금에 고정함으로써 화폐 가치를 안정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만들어진 브레턴우즈 체제도 같은 원리에 기반했다. 달러 가치를 금에 연동하고, 다른 통화의 가치를 달러에 연동하는 방식이었다. 변동환율제로 전환되고 1970년대 높은 인플레이션을 겪은 이후 많은 나라가 새로운 명목 앵커를 도입했다. 바로 인플레이션 타깃팅(inflation targeting·물가안정목표제)이다. 중앙은행이 가령 2%라는 물가상승률 목표를 제시하고, 물가가 목표치를 웃돌면 통화정책을 긴축하고 목표치를 밑돌면 완화하는 방식이다. 이런 정책이 반복되면 사람들은 물가상승률이 결국 목표 수준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게 된다.이러한 믿음 자체가 물가를
2026.09.01 11:12
경제를 재편하려는 재정정책…배분적 성격되는 통화정책 [지안루카 베니그노]
지난 30년 대부분의 기간 동안 거시경제학자들은 단순한 역할 분담을 전제로 했다. 중앙은행은 물가를 관리하고, 정부는 국가 재정을 관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분리가 도전받고 있다. 세계 주요 국가를 살펴보자. 미국은 재정건전성 회복을 계속 의제로 올려놓을 만큼 큰 폭의 재정적자를 기록하고 있지만, 현재 워싱턴의 논쟁은 반도체법(CHIPS Act)이나 인플레이션 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에서 물러날 것인지가 아니라 여기에 무엇을 더할 것인지에 맞춰져 있다. 일본은 370조엔 규모의 장기 전략 투자 프로그램을 승인했다. 그리고 7월 13일 한국의 이재명 대통령은 내년도 예산안을 발표했다. 이는 사상 처음으로 800조원을 넘어서는 예산으로, 10%가 넘는 증가다. 반도체 호황에 따른 이례적인 세수 증가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그 일부는 장기 전략 투자를 위한 새로운 미래대응펀드의 재원이 된다. 동시에 정부는 반도체, 피지컬 AI, 데이터센터 분야의
2026.08.18 11:37
AI 모델은 빌려쓰고, 기억은 소유하라 [크리스티안 카탈리니]
기업의 가장 가치 있는 AI(인공지능) 자산은 ‘정답’이 아니다. 회사의 최고 전문가들이 어떤 답변을 채택하고, 거부하며, 수정했는지가 축적된 기록이 가장 가치가 있다. AI모델의 능력은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다. 코드를 작성하고, 시장을 분석하며, 소프트웨어를 구동한다. 뛰어난 모델은 지시가 모호하더라도 거의 완성된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경영진에 이것은 마치 모든 것을 읽고, 잠도 자지 않으며, 어째서인지 회사의 문화에는 관심이 없는 지치지 않는 새 동료를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위험한 혼란을 야기한다. 지능이 이토록 경이로우니, 모델 자체가 강력한 ‘해자(Moat·경쟁사가 쉽게 따라올 수 없는 지속적인 경쟁우위의 뜻으로 씀)’임에 틀림없다는 착각이다. 넷스케이프(Netscape)는 1990년대에 이 교훈을 배웠다. 그들은 획기적인 제품을 가졌고, 잠시나마 인터넷으로 가는 관문을 독점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무료로 제공하고
2026.07.16 11:49
금리인하 할 수 없는 케빈 워시 연준 의장 [지안루카 베니그노]
오는 16·17일(미국 현지시간) 케빈 워시는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으로서 첫 회의를 주재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1년 가까이 공을 들인 끝에 마침내 자신이 원하던 중앙은행 수장을 손에 넣었다. 인준안은 지난 5월 찬성 54표 대 반대 45표라는, 역대 연준 의장 중 가장 아슬아슬한 표차로 상원을 통과했다. 하지만 새 의장이 가장 먼저 하게 될 일은 그를 임명한 대통령을 실망시키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는 금리를 인하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반항이 아니다. 지금의 경제 데이터가 요구하는 당연한 결과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월 워시를 의장으로 지명했을 때만 해도 통화 완화(금리 인하)를 주장할 만한 근거는 제법 그럴듯했다. 전체 물가상승률(소비자물가지수)이 2.4%로 내려앉았고, 2025년 시작된 디스플레이션(물가상승률 둔화)이 마무리 국면에 접어든 것처럼 보였다. 대출 금리 인하를 공약으로 내걸었던 대통령 입장에서는 당연히 금리가 내려가리라 기대할 만했다. 하지만
2026.06.15 11:09
한국과 일본의 AI 거버넌스…정상 향한 두 갈래 길 [머브 히콕]
2020년부터 AI·디지털정책센터(CAIDP·Center for AI and Digital Policy)는 민주주의 가치와 기본권을 중심으로 각국의 AI 정책과 관행을 분석한 가장 포괄적인 평가인 ‘CAIDP AI 지수(CAIDP AI Index)’를 발표해왔다. 이 지수가 처음 발표된 이후 줄곧 세계 최상위권에는 두 동아시아 국가가 자리해왔다. 바로 일본과 대한민국이다. 서로 이웃한 두 나라가 AI 거버넌스라는 동일한 목적지를 향해 의미 있게 다른 경로를 선택했다는 점은, 세계의 AI 거버넌스 대응 방식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21년 당시 임혜숙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CAIDP AI 지수에서 한국이 티어(Tier) 1 국가로 평가받았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CAIDP가 2026년판 지수를 발표했을 때 일본은 Tier 1 지위를 유지한 반면, 한국은 처음으로 Tier 2로 내려갔다. 일본이 순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유럽평의회(Council of Eur
2026.06.04 11:12
AI가 알아서 돈 쓰는 시대…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크리스티안 카탈리니]
1688년, 해상 무역에서 가장 가치 있는 부동산은 창고나 조선소가 아니었다. 영국 런던의 타워 스트리트(Tower Street)에 있던 어느 커피하우스였다. 에드워드 로이드(Edward Lloyd)가 운영하던 그곳의 커피 맛은 평범했다. 하지만 그 공간을 특별하게 만든 건 나무 벤치에서 이뤄지던 의식이었다. 상인이 선박, 선장, 항로, 화물, 계절 등 항해에 대해 설명하면 방 반대편에 있던 낯선 사람이 걸어와 펜을 들고 그 설명 아래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했다. 배가 돌아오지 못할 경우 자신이 돈을 지급하겠다는 동의였다. 오늘날에도 이 행동을 가리키는 단어가 사용된다. 우리는 그를 언더라이터(Underwriter·인수업자)라고 부른다. 로이드의 커피하우스에서 발명된 건 정확히 말해 보험이 아니었다. 아무도 측정할 수 없는 위험 아래에 기꺼이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겠다는 의지였다. 결과적으로 그게 대양을 가로지르는 해상 운송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었다. 338년이 흐른 지금, 동일한 문
2026.05.28 11:42
에너지 대란 덮친 동남아…‘원전 카드’ 꺼낸 러시아 [프랑소와즈 니콜라]
과도하게 큰 경제적 충격 2월 말 시작된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은 세계에서 가장 전략적으로 중요한 해상 요충지 가운데 하나인 호르무즈 해협을 사실상 봉쇄하는 결과를 낳았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2024년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 원유와 액화천연가스(LNG)의 80% 이상이 아시아로 향했다. 해운이 사실상 중단되면서 발생한 석유·가스 공급 감소와 가격 상승은 동아시아에 특히 큰 충격을 안겼다. 이 충격은 역내 국가마다 다르게 나타나고 있으며, 중국은 다른 국가들보다 비교적 유리한 위치에 있다. 첫째, 중국은 적극적인 공급선 다변화 전략과 경제의 빠른 전기화 덕분에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만큼 걸프 지역의 석유·가스 수입에 의존하지 않는다. 둘째, 중국은 상업용 및 전략 비축유를 통해 충격을 견뎌낼 수 있었다. 에너지 자급률이 15.3%에 불과한 일본 역시 취약하지만, 상당한 규모의 원유 비축량을 활용할 수 있으며 중동산 가스 의존도도 크게 낮췄다. 한국의 경우 화석연료
2026.05.27 11:17
수요 억제만으론 한계...수십 년 내다본 주택 공급 필요 [스테파니 스탠체바]
한국만큼 주소가 가진 의미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회도 드물다. 부모들은 학군을 중심으로 삶 전체를 재편한다. 젊은 직장인들은 특정 지하철 노선을 쫓는다.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두 동네의 차이는 한 아이의 미래와 가계의 자산, 심지어 아파트 단지마다 다르게 느껴지는 경제 상황 전반을 결정짓기도 한다. 흥미로운 건 여러 국가의 경제 연구들은 한국 가정이 오래전부터 직감해 온 사실을 확인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어디에 사느냐’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를 상당 부분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결국 주거는 단순히 주거 면적이나 금리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시민들이 자국 경제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공정함과 기회에 대해 무엇을 믿는지, 그리고 자녀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를 결정하는 근본적인 동력 중 하나다. 경제학 연구를 통해 밝혀진 세 가지 결과는 왜 주거 문제가 가계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 이상으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준다. 자라는 곳이 미래를 만든다 더 나은 학교를 찾아 대치동,
2026.05.15 11:18
내가 만난 신현송 후보자…현대 중앙은행 총재의 조건 [지안루카 베니그노]
나는 2000년대 초반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 후보자를 처음 만났다. 나는 갓 박사 학위를 마친 상태였고, 그는 이미 런던정경대(LSE)의 저명한 인사였다. 당시 금융학과에 재직 중이던 그는 경제성과연구소(CEP)의 금융안정프로그램에 나를 기꺼이 받아줬다. 당시 나의 배경은 전통적인 국제 거시경제학에 치우쳐 있었다. 경제의 금융 측면에는 그리 능숙하지 못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기 전까지만 해도 거시경제학에서 금융이라는 영역은 담론의 변두리에 머물러 있었다. 안타깝게도 신 후보자의 통찰로부터 직접 혜택을 입은 기간은 짧았다. 그가 학문적 성취를 바탕으로 곧 프린스턴대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의 인상은 내게 깊이 각인됐다. 그 후로도 우리는 여러 번 마주쳤다. 가장 최근의 조우는 불과 한 달 전으로, 내가 국제결제은행(BIS)을 방문했을 때였다. 우리는 카페테리아에서 잠시 만났는데, 그는 세미나에 다시 들어가기 전 커피 한 잔을 챙기느라 서두르는 모습이었다. 내가 그를
2026.04.06 12:03
슬롭 실링(Slop Ceiling): AI 오물과 인간 검증의 한계 [크리스티안 카탈리니]
AI는 빛의 속도로 생성하지만, 검증은 신뢰의 속도로 움직인다. 얼마 전 아마존웹서비스(AWS)에서 한 사건이 발생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클라우드 엔지니어들이 달라붙었음에도 몇 시간 동안이나 사태를 되돌리지 못했다. 문제는 시스템 자체의 결함이 아니었다. 제로데이 공격(zero-day exploit·소프트웨어 제작사도 모르는 약점을 이용한 해커의 공격)도, 하드웨어의 연쇄 고장도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허무할 정도로 평범한 문제였다. AI 코딩 어시스턴트에게 소프트웨어 환경을 수정하라는 일상적인 작업이 맡겨졌다. 이 도구는 환경을 분석하더니 ‘전체를 다 부수고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게 가장 효율적’이라고 판단해 그대로 실행해 버렸다. 배관공을 불러 물이 새는 수도꼭지를 고쳐달라고 했는데, 집에 돌아와 보니 화장실이 통째로 철거돼 있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 AI는 아주 ‘열심히’ 일했지만, 작업 시작 전 그 계획을 검토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태평양 건너편에서도 또 다른 형태의 검증
2026.03.25 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