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가 알아서 돈 쓰는 시대…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크리스티안 카탈리니]
1688년, 해상 무역에서 가장 가치 있는 부동산은 창고나 조선소가 아니었다. 영국 런던의 타워 스트리트(Tower Street)에 있던 어느 커피하우스였다. 에드워드 로이드(Edward Lloyd)가 운영하던 그곳의 커피 맛은 평범했다. 하지만 그 공간을 특별하게 만든 건 나무 벤치에서 이뤄지던 의식이었다. 상인이 선박, 선장, 항로, 화물, 계절 등 항해에 대해 설명하면 방 반대편에 있던 낯선 사람이 걸어와 펜을 들고 그 설명 아래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했다. 배가 돌아오지 못할 경우 자신이 돈을 지급하겠다는 동의였다. 오늘날에도 이 행동을 가리키는 단어가 사용된다. 우리는 그를 언더라이터(Underwriter·인수업자)라고 부른다. 로이드의 커피하우스에서 발명된 건 정확히 말해 보험이 아니었다. 아무도 측정할 수 없는 위험 아래에 기꺼이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겠다는 의지였다. 결과적으로 그게 대양을 가로지르는 해상 운송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었다. 338년이 흐른 지금, 동일한 문
2026.05.28 11:42
에너지 대란 덮친 동남아…‘원전 카드’ 꺼낸 러시아 [프랑소와즈 니콜라]
과도하게 큰 경제적 충격 2월 말 시작된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은 세계에서 가장 전략적으로 중요한 해상 요충지 가운데 하나인 호르무즈 해협을 사실상 봉쇄하는 결과를 낳았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2024년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 원유와 액화천연가스(LNG)의 80% 이상이 아시아로 향했다. 해운이 사실상 중단되면서 발생한 석유·가스 공급 감소와 가격 상승은 동아시아에 특히 큰 충격을 안겼다. 이 충격은 역내 국가마다 다르게 나타나고 있으며, 중국은 다른 국가들보다 비교적 유리한 위치에 있다. 첫째, 중국은 적극적인 공급선 다변화 전략과 경제의 빠른 전기화 덕분에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만큼 걸프 지역의 석유·가스 수입에 의존하지 않는다. 둘째, 중국은 상업용 및 전략 비축유를 통해 충격을 견뎌낼 수 있었다. 에너지 자급률이 15.3%에 불과한 일본 역시 취약하지만, 상당한 규모의 원유 비축량을 활용할 수 있으며 중동산 가스 의존도도 크게 낮췄다. 한국의 경우 화석연료
2026.05.27 11:17
수요 억제만으론 한계...수십 년 내다본 주택 공급 필요 [스테파니 스탠체바]
한국만큼 주소가 가진 의미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회도 드물다. 부모들은 학군을 중심으로 삶 전체를 재편한다. 젊은 직장인들은 특정 지하철 노선을 쫓는다.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두 동네의 차이는 한 아이의 미래와 가계의 자산, 심지어 아파트 단지마다 다르게 느껴지는 경제 상황 전반을 결정짓기도 한다. 흥미로운 건 여러 국가의 경제 연구들은 한국 가정이 오래전부터 직감해 온 사실을 확인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어디에 사느냐’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를 상당 부분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결국 주거는 단순히 주거 면적이나 금리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시민들이 자국 경제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공정함과 기회에 대해 무엇을 믿는지, 그리고 자녀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를 결정하는 근본적인 동력 중 하나다. 경제학 연구를 통해 밝혀진 세 가지 결과는 왜 주거 문제가 가계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 이상으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준다. 자라는 곳이 미래를 만든다 더 나은 학교를 찾아 대치동,
2026.05.15 11:18
내가 만난 신현송 후보자…현대 중앙은행 총재의 조건 [지안루카 베니그노]
나는 2000년대 초반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 후보자를 처음 만났다. 나는 갓 박사 학위를 마친 상태였고, 그는 이미 런던정경대(LSE)의 저명한 인사였다. 당시 금융학과에 재직 중이던 그는 경제성과연구소(CEP)의 금융안정프로그램에 나를 기꺼이 받아줬다. 당시 나의 배경은 전통적인 국제 거시경제학에 치우쳐 있었다. 경제의 금융 측면에는 그리 능숙하지 못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기 전까지만 해도 거시경제학에서 금융이라는 영역은 담론의 변두리에 머물러 있었다. 안타깝게도 신 후보자의 통찰로부터 직접 혜택을 입은 기간은 짧았다. 그가 학문적 성취를 바탕으로 곧 프린스턴대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의 인상은 내게 깊이 각인됐다. 그 후로도 우리는 여러 번 마주쳤다. 가장 최근의 조우는 불과 한 달 전으로, 내가 국제결제은행(BIS)을 방문했을 때였다. 우리는 카페테리아에서 잠시 만났는데, 그는 세미나에 다시 들어가기 전 커피 한 잔을 챙기느라 서두르는 모습이었다. 내가 그를
2026.04.06 12:03
슬롭 실링(Slop Ceiling): AI 오물과 인간 검증의 한계 [크리스티안 카탈리니]
AI는 빛의 속도로 생성하지만, 검증은 신뢰의 속도로 움직인다. 얼마 전 아마존웹서비스(AWS)에서 한 사건이 발생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클라우드 엔지니어들이 달라붙었음에도 몇 시간 동안이나 사태를 되돌리지 못했다. 문제는 시스템 자체의 결함이 아니었다. 제로데이 공격(zero-day exploit·소프트웨어 제작사도 모르는 약점을 이용한 해커의 공격)도, 하드웨어의 연쇄 고장도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허무할 정도로 평범한 문제였다. AI 코딩 어시스턴트에게 소프트웨어 환경을 수정하라는 일상적인 작업이 맡겨졌다. 이 도구는 환경을 분석하더니 ‘전체를 다 부수고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게 가장 효율적’이라고 판단해 그대로 실행해 버렸다. 배관공을 불러 물이 새는 수도꼭지를 고쳐달라고 했는데, 집에 돌아와 보니 화장실이 통째로 철거돼 있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 AI는 아주 ‘열심히’ 일했지만, 작업 시작 전 그 계획을 검토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태평양 건너편에서도 또 다른 형태의 검증
2026.03.25 11:12
디지털 위안화와 통화 권력의 新지형 [지안루카 베니그노]
지난 반세기 동안 국제통화 질서의 논리는 비교적 명확해 보였다. 한 통화가 세계적 역할을 수행하려면 자유롭게 태환(兌換)될 수 있어야 했다. 국경을 넘어 쉽게 교환되고, 투자에 활용 가능하며, 깊고 개방적인 금융시장을 기반으로 해야 했다. 달러가 지배적 통화가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그 지위가 오랫동안 흔들릴 수 없어 보였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중국의 디지털 위안화는 이 전제를 시험할 수 있다. 중국 정부는 자본 통제를 서둘러 해체하거나 금융시스템을 서구식으로 개방하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중국은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 형태의 화폐와 새로운 국경 간 결제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 이를 통해 위안화는 완전한 태환성을 갖추지 않고도 국제적으로 유통될 수 있는 길을 열 가능성이 있다. 지금까지 디지털 위안화를 둘러싼 논의는 주로 기술적 측면, 감시 강화의 가능성, 혹은 달러 패권에 대한 도전이라는 프레임에 집중돼 왔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보다 미묘하면서도 잠재적으로 훨씬
2026.02.10 11:09
일본 인플레이션 5년차…가격보다 중요한 건 임금상승 [와타나베 츠토무]
약 30년에 걸친 이른바 ‘만성 디플레이션(물가하락)’을 겪은 끝에 일본은 마침내 2022년 봄 인플레이션(물가상승) 국면에 들어섰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사실상 변동이 없던 물가와 임금이 상승하기 시작한 것이다. 올해는 그 전환이 시작된 지 5년째에 해당한다. 이 변화가 역사적으로 의미가 크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더 중요한 질문은 일본이 과연 ‘정상적인’ 경제 환경으로의 이동을 완수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이번 변화는 일본의 디플레이션 극복 정책이 마침내 성과를 거둔 결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일본의 디플레이션 탈출은 정책 당국이 당초 구상했던 방식으로 전개되지는 않았다. 인플레이션은 주로 해외에서 수입된 것이었고, 이후에야 임금 인상 등 국내 요인과 맞물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기시다 후미오 전 총리가 말한 ‘임금과 물가의 선순환’에 한 걸음 더 다가간 것은 분명하다. 정상적인 경제에서는 물가가 연 2% 안팎의 완만한 속도로 상승하고, 임금은
2026.02.06 11:35
소버린AI를 위한 다른 길: 한국의 SLM<소형언어모델>과 오픈소스 전략 [머브 히콕]
한국의 인공지능(AI) 전략은 세계 3대 AI 강국으로 도약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정부는 네 가지 정책 방향을 제시했다. ① 기술과 인프라 혁신 ② 스타트업과 인재 육성 ③ 포용성과 공정성의 문화 조성 ④ AI 거버넌스 분야에서의 글로벌 리더십 확보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핵심 개념으로 정부는 ‘소버린 AI(sovereign AI)’를 강조해 왔다. 이는 경제적 경쟁이자 국가 안보 차원의 필요로 규정된다. 경제적 경쟁이란 미국과 중국의 AI 파운데이션 모델에 대한 글로벌 대안이 되겠다는 의미다. 안보적 측면은 특히 국가 안보와 관련된 데이터가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역량을 뜻한다. 몇 달 전 정부는 소버린 AI 파운데이션 모델 프로젝트에 대규모 예산을 투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최종 선정 기업에는 2000억원(미화 73억5000만달러) 이상의 공공 자금이 지원될 예정이다. 이 예산에는 데이터 확보 및 처리, GPU 임차, 인건비 등이 포함된다. 아직 선정 절차는
2026.02.02 11:07
핀테크의 AI 질문, 상당수가 틀렸다 [크리스티안 카탈리니]
핀테크는 지난 15년 동안 ‘은행은 인가 문제(charter problem)를 안고 있는 소프트웨어 회사’라는 말을 점잖게 설명해 왔다. 때로는 마케팅 문구였고, 때로는 사실이었으며, 또 어떤 때는 금융 서비스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애플리케이션(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돈을 만질 자격을 얻고, 유지하는 일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말이었다. AI는 이 문제를 완화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날카롭게 만든다. 대중적으로 유통되는 AI 서사는 이것이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범용 기술이라는 것이다. AI는 코드를 작성하고, 문서를 요약하며, 고객 문의에 답하고, 정책을 초안 작성하고, 의심 거래를 표시하고, 대출 심사를 돕고, 무언가를 증명하려는 여름 인턴보다 더 빠르게 발표 자료를 만든다. 다시 말해 AI는 ‘소프트웨어화된 노동(labor-as-software)’이며, 금융 서비스의 상당 부분은 서류 작업, 조정, 예외 처리, 서로 단절된 시스템 사이에서 정보를 옮기는 일로 구성돼 있
2026.01.28 11:10
한 시대의 종언, 글로벌 무역 질서 어디로 가나 [프랑소와즈 니콜라]
2025년, 분수령의 해 경제학자의 시각에서 볼 때 2025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우리가 익숙하게 여겨왔던 규칙 기반 글로벌 무역 질서가 사실상 막을 내린 해로 기억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이 체제는 이미 상당 기간 압박을 받아왔고, 변화하는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거나 대응하지 못하면서 점차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이 특별한 이유는, 기존 질서에 대한 공격이 다름 아닌 이 시스템의 설계자였던 미국으로부터 나왔다는 점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도입한 이른바 ‘상호 관세(reciprocal tariffs)’는 비차별 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조치이자, 다자간 규칙 기반 질서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다. 비차별 원칙은 전후 무역 체제의 핵심 기둥 가운데 하나였다.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그리고 이후 세계무역기구(WTO)에 제도화된 최혜국대우(MFN) 조항에 따르면, 회원국이 특정 교역 상대국에 관세 인하와 같은 유리한 조건을 부여할 경우, 그 혜택은
2026.01.21 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