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 유동성 90조 넘쳐나는데…돈이 돌지 않는 ‘유동성 함정’

부동산ㆍ채권시장만 반짝?…“재정ㆍ구조개혁 필요”

[헤럴드경제=강승연 기자]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인 연 1.25% 수준으로 낮추면서 장기간의 저금리 기조에도 꽉 막혀 있던 유동자금의 움직임이 살아날 수 있을지 주목되고 있다.

그동안 시중에 막대한 돈을 풀어도, 돈이 돌지 않는 ‘돈맥경화’ 현상이 장기화되면서 우리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리는 구조적 요인으로 작용해왔다.

한은이 가계부채 증가, 자본유출 등 부작용 우려에도 불구하고 1년 만에 기준금리 인하를 단행한 데는 그만큼 경기 상황을 절박하게 보고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금리인하 1주일①]유동성 함정 뚫고 뭉칫돈 움직일까

시중에 남은 유동성 90조원…유통속도는 최저= 15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한은이 공급한 화폐 발행잔액(말잔)은 지난 4월 말 현재 90조2911억원으로, 1년 전에 비해 11조5921억원(14.7%) 증가했다.

화폐 발행잔액은 한은이 시중에 공급한 화폐 중 환수한 금액을 빼고 시중에 남아 유통되고 있는 금액을 의미한다.

화폐 발행잔액은 올해 2월 처음으로 90조원을 돌파한 뒤 3월에 감소했다가 다시 90조원대로 복귀했다.

시중 통화량이 이처럼 많음에도 불구하고 돈이 유통되는 속도는 부진한 상황이다.

한은이 공급한 본원통화가 시중에서 몇 배의 통화량을 창출했는지를 나타내는 통화승수(평잔ㆍ계절조정계열 기준)는 올 4월 16.9로 역대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6년 전인 2010년 4월(25.0)과 비교하면 8.1이나 하락한 것이다. 당시 한은이 1원을 공급했을 때 25원의 통화량이 창출됐다면, 지금은 17원 정도밖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명목 국내총생산(GDP)을 광의의 시중통화량(M2)으로 나눠 구하는 통화유통 속도는 1분기 0.71로, 전분기보다 0.01 오르는 데 그쳤다.

통화유통 속도는 2008년 0.81이었지만, 이후 지속적으로 하락해 0.7대까지 주저앉았다.

[금리인하 1주일①]유동성 함정 뚫고 뭉칫돈 움직일까

금리 낮춰도 유동성 함정 우려↑= 돈을 풀어도 돈이 돌지 않는 유동성 함정으로, 한은의 기준금리 인하 효과가 퇴색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우리 경제가 ‘금리인하는 기업투자와 가계소비 증가를 유발한다’는 경제학적 원리가 통하지 않는 구조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신 저금리 상황에서 통화량을 늘려도 가계와 기업의 현금 보유 심리만 부추기는 ‘유동성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내수ㆍ수출 부진이 계속되면서 경기 반등의 기회를 찾기 어려운 가운데 기업 구조조정, 미국의 금리인상,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등 대내외 불안요인까지 산적해 있어 이 같은 우려를 더한다.

임진 한국금융연구원 거시경제연구실장은 “지금처럼 불확실성이 큰 상황에선 금리가 인하됐다고 해서 기업들이 섣불리 투자에 나서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기업 심리는 이미 바닥 수준이다. 4월 제조업 평균 가동률은 71.0%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9년 3월(69.9%) 이후 최저치로 떨어졌다. 조선ㆍ해운업종 구조조정이 본격화되면 기업 생산활동은 더욱 위축될 것으로 보인다.

가계는 자산 대부분이 부동산에 묶여있어 마땅히 쓸 만한 여유자금이 없는 상황이다. 한은ㆍ통계청의 ‘국민대차대조표’를 보면 작년 말 가계 및 비영리단체 순자산 7176조2000억원 중 부동산 자산은 5305조1000억원으로 73.9%를 차지한다. 가계 및 비영리단체 순자산에서 부동산자산을 포함한 비금융자산 비중은 75.6%로, 미국(34.9%), 일본(44.3%), 캐나다(55.1%) 등 주요 선진국에 비해 훨씬 높은 수준이다.

부동산ㆍ채권 ‘반짝’…한은 “재정ㆍ구조개혁 필요”=기준금리 인하로 부동산, 주식, 채권 등 자산시장은 호재를 맞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조심스럽게 일고 있다.

우선 부동산 시장에서는 이번 금리인하 조치가 주택경기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사상최고가에 근접한 강남권 재건축아파트 가격을 더 밀어올릴 것이란 전망도 있다.

그러나 실수요자보다는 전문 투자자나 단타세력 위주로 쏠릴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대출규제가 강화된 상황에서 금리인하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기준금리 인하 이후 주택담보대출 문의가 늘기는 했지만, 과거와 달리 원금과 이자를 같이 갚아야 한다는 고객 부담이 큰 것 같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박합수 KB국민은행 도곡스타PB센터 부동산전문위원은 “기준금리가 0.25%포인트 내려가더라도 대출금리에 3분의 1 이상 반영되기 힘들다”면서 “금리인하 이후 유동성 흐름은 수익형 부동산, 재건축아파트, 전ㆍ월세 전환 등 상대적으로 수익성이 괜찮은 투자처로 이동할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채권 시장은 반짝 활기를 띠는 모습이다. 채권시장에 수요가 몰리면서 국고채 금리는 13일까지 5거래일 간 사상최저치를 잇달아 경신했다. 14일에 반등하기는 했지만 이를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경계감에 따른 일시적 소강상태로 보는 시각이 많다.

한은은 기준금리 인하의 파급효과가 단기간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단 추이를 지켜본다는 입장이다.

특히 이주열 총재가 거듭 강조했듯이 통화정책과 함께 재정정책, 구조개혁이라는 ‘3박자’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고 보고 있다.

한은 관계자는 “재정과 구조개혁의 뒷받침 이없으면 통화정책 여력만 소진하는 셈”이라며 “하반기에 재정절벽이 오면 금리인하 부작용만 부각될 것”으로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