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이세진 기자] ‘인권영화’라고 단정 지어 부르기엔 담은 이야기가 많다. 다른 인권영화들처럼 관객에게 “잘 좀 해”라며 혼내거나 타이르지 않는다. 대신 “같이 생각해보자”라고 자전적인 질문을 던지는 따뜻함이 배어 있다. 그래서인지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영화 프로젝트 12번째 작품인 ‘4등’은 수업 교재로 쓰이는 정도로 멈출 것 같지 않다. 어린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만하면 상업성도 충분하다.
감독은 의외의 인물이다. 불륜의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줬던 ‘해피엔드’(1999), 노년의 욕망을 솔직하게 다룬 ‘은교’(2012)를 연출한 정지우 감독(48)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지금까지 그가 만들었던 이야기와는 전혀 방향이 다르지만, 영화 제작 초반부터 그는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라고 말해 왔다. 정지우 감독을 7일 오전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 “맞을 짓이란 뭘까…없다”= 영화 ‘4등’은 수영이 마냥 좋지만 대회만 나가면 ‘만년 4등’인 초등학생 준호(유재상)가 엄마 정애(이항나)의 닦달에 코치 광수(박해준)를 만나게 되면서 엄한 체벌에 시달리게 되는 이야기를 담았다. “맞아서라도 1등만 하면 좋겠다”는 엄마와, “맞아서라도 1등을 꼭 해야 하냐”는 아이, “때리는 스승이 진짜”라는 코치의 갈등이 이야기의 중심축이다.
정지우 감독은 2013년 말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영화 연출 제의를 받고 수영하는 소년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촬영은 2014년 늦여름부터 시작됐다.
준호 역할을 한 유재상(13) 군과 그의 어머니에게 정지우 감독은 ‘맞는 장면이 있다’라는 설명을 빙빙 돌아 했다. 실제로 수영 선수이기도 한 유재상 군은 한참 이야기를 듣더니 “안 맞고 어떻게 운동을 해요”라는 말을 던졌다.
정 감독은 이 말을 듣고 한동안 멍한 기분이었다고 했다. 그는 “예전처럼 감정적으로 때리는 건 아니더라도 여전히 체벌이 없어지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라며 “사람 몸이 체벌을 통해 각성했을 때 더 집중이 되고 기록이 나오고 하는 이유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영화에서 ‘맞기 싫어서’ 대표팀을 뛰쳐나온 광수는 아이를 무자비하게 때리는 코치가 된다. 수영장에서 맞고 훈련한 아이는 집에 돌아와 동생에게 똑같은 체벌을 가한다. “몇 대 맞을래”라면서 어른에게 배운 말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모습은 폭력의 대물림을 암시하고 있다.
정 감독은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 ‘맞을 짓이란 뭘까’라는 질문을 했다.
“폭력은 어떤 위기를 극복하는 도구인데, 수영장에서 맞고 온 준호가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동생에게 ‘엎드려뻗쳐’를 시키고 “너 맞을 짓 했지”라고 하는데요. 그런데 동생이 정말 맞을 짓을 했나요? 아무도 동의 안 할 거예요. 이 폭력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물음을 던져 봐야죠.”
결국 정 감독은 “맞을 짓이라는 게 없다는 생각에서 출발하자”고 마음먹었다.
“요즘 말 못하게 나쁜 아이들이 많고 소년범죄도 많다고 하지만, 조금 더 이성적인 방식의 벌칙을 만들자는 거에요. 더 이상 ‘고등학교 선생님 회갑때 꽃다발 들고 찾아 온 애들은 나한테 맞은 애들이야’ ‘맷정이 중요한 거야’ 이게 통용되던 시대와는 달라졌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어요.”
▶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살아야지…아이를 기다려 줄 필요가 있다”= ‘스포츠계 폭력’이라는 주제를 내세웠지만 사실 영화는 교육의 어떤 분야에도 대입이 가능한 이야기를 담았다. 정 감독은 “종목이나 분야가 다르더라도 얘기는 다 똑같더라”라고 했다.
“수영을 하는 소년이 주인공이고, 그 소년을 둘러싼 여러 환경들을 다 그려내면서 교육의 문제, 나아가서는 사는 문제를 담아내고 싶었어요. 예를 들면 코치, 부모, 형제, 학교가 소년을 둘러싼 환경이겠죠. 그림 그리는 사람도, 음악 하는 사람도 상급 학교에 가기 위해서 비슷한 사례를 겪는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죠. 결국엔 다 똑같더라고요.”
그래서 영화는 체벌도 체벌이지만, 아이를 옥죄는 여러 환경들도 놓치지 않고 담았다. 아이는 등교하기 전 새벽 수영을 하고,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영어 회화 과외를 받는다.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밖에서 뛰어놀 시간은 전혀 주어지지 않는다.
정 감독은 스스로 고등학교 1학년 자녀를 둔 학부모로서의 심정이 영화에 많이 녹아있다고 했다. 그는 “이 아이가 사람구실 하면서 한 인간으로 존중받으며 보통의 행복을 누리고 살 수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인데, 요즘에는 이게 왜 이렇게 힘겨운 걸까”라면서 “사회가 이렇게 변했으니 교육의 패러다임도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고 했다.
“평범함 자체가 어려운 시대에 접어들었다면, 무조건 판검사나 의사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영화는 감독의 이런 생각에 꼬리를 붙였다.
“행복한 걸 찾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어떻게 한번에 압니까, 시행착오를 겪고 실패할 시간이 필요한데요. 아이가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데 과연 우리가 기다려줄 수 있느냐의 문제인데, ‘빨리 결정해야지 남보다 먼저 준비해서 이길 수 있다’라는 구시대적인 성공 패러다임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 같아요.”
이같은 감독의 생각은 준호의 ‘도둑수영’ 장면으로 아름답게 표현됐다. “수영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던 준호가 수영을 잊지 못해 한밤중 레인이 걷힌 수영장에 몰래 들어가 한 줄기 빛을 따라 유영하는 장면이다.
“수영장이 사각형으로 생겼는데 레인이 있으면 카메라가 들어갈 틈이 없어요. 그 안에 들어간 사람은 ‘전진ㆍ속도ㆍ경쟁’에 놓이게 되는 구도에요. 군대 제식 행렬을 생각해보세요, 이상하게 걸으면 문제아죠. 수영장에 레일을 걷으니 굉장히 자유로운 공간이 되면서 함부로 놀아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 곳이 되더라고요. 남탕 냉탕처럼요, 거기선 늙으나 어리나 각 잡고 있는 사람이 없어요. ‘어푸어푸’ 대지.”
정지우 감독은 올해 초가을쯤 새 영화 촬영에 들어간다. 이번엔 ‘법정 휴먼 드라마’ 란다. 이외에도 국가인권위원회의 프로젝트는 아니지만 ‘4등’과 연결고리가 있는 영화도 한 번 더 내보일 계획이다. 그는 “‘나도 솔직히 부족해, 너도 좀 부족하지’라고, 서로 공감하면서 영화를 보셨으면 좋겠어요”라는 인사를 남겼다.
jinlee@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