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정진영 기자] 딥 퍼플(Deep Purple), 블랙사바스(Black Sabbath), 주다스 프리스트(Judas Priest), 아이언 메이든(Iron Maiden)……. 이들은 과거 70~80년 세계 헤비메탈 계에 획을 그은 전설이자 지금까지 활동 중인 현역입니다. 이제 환갑을 넘어 칠순을 향해가는 멤버들도 적지 않지만, 여전히 녹슬지 않은 무대 매너로 관객들을 사로잡는 ‘상남자’들이죠. 이들 노장의 공연장에는 밴드의 멤버들과 비슷한 연령대의 관객들이 적지 않습니다. 머리카락은 희끗희끗하고, 주름살도 적지 않지만 나이를 잊은 채 머리를 흔드는 관객들의 모습은 한국의 헤비메탈 마니아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광경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헤비메탈은 비주류 중의 비주류인 장르인데다 해외의 전설적인 밴드만큼 긴 역사를 가진 밴드를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제 우리도 자랑할 만한 역사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든든한 팬을 가진 밴드 하나 정도는 가지게 됐다고 자부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가느다란 봄비가 때 이른 벚꽃 잎을 적시던 지난 29일 오후 7시 무렵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 K아트홀. 공연장에 모인 관객들의 연령대는 얼핏 보기에도 적지 않았습니다. 자녀들을 동반한 관객도 다수 눈에 띄더군요. 이날 공연의 주인공은 ‘한국 록의 전설’ 밴드 블랙홀입니다. 이날 공연은 최근 9년 만에 새 앨범 ‘호프(Hope)’를 발표한 블랙홀의 새 앨범 발매를 기념하는 자리였습니다.

[취재X파일] 팬과 함께 나이들 수 있는 밴드가 있다는 건 행복하다

‘국민가수’ ‘전설’ 등의 수식어가 흔해진 세상이지만 블랙홀이라는 이름 앞에는 이 같은 수식어가 조금도 모자람이 없어 보입니다. 결성 30년을 눈앞에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결성 이후 단 한 번도 공백기 없이 활동해 온 한국의 유일한 밴드이니까요. 이는 시나위, 부활, 백두산 등 현재 ‘전설’이라고 불리는 여타 밴드들도 이루지 못한 위업입니다. 또한 리더 주상균(기타ㆍ보컬)을 비롯해 정병희(베이스), 이원재(기타), 이관욱(드럼) 등 블랙홀의 멤버 대부분은 적게는 10년에서 많게는 20년 이상 함께 해왔을 정도로 탄탄한 팀워크를 자랑합니다. 멤버들의 이합집산이 심각한 편인 한국 헤비메탈 계에서 이는 매우 보기 드문 현상이죠.

블랙홀의 가치는 단순히 오랫동안 활동했다는 데에 그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한국 헤비메탈 밴드들이 외국의 트렌드를 따라가기 바빴던 80년대 말부터 블랙홀은 홀로 한국적인 헤비메탈이라는 새로운 길을 개척해왔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을 노래한 1990년 2집 ‘서바이브(Survive)’의 ‘녹두꽃 필 때에’를 비롯해 한국사의 각종 중요한 사건과 사회적인 부조리를 훑었던 1995년 정규 4집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 제3회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록 앨범상, 최우수 록 싱글상을 수상한 2005년 8집 ‘히어로(Hero)’ 등은 헤비메탈이란 장르를 넘어 한국 대중음악사에 있어서 뛰어난 음악적 성취를 보여준 역작입니다. 안정된 라인업으로 수십 년 동안 공백기 없이 활동하며 탄탄한 음악을 발표해 온 밴드 앞에 ‘전설’이란 수식어는 결코 과하지 않습니다.

공연 전 주상균은 “이번 콘서트는 무대ㆍ관객ㆍ연주만으로 구성됐던 그간의 블랙홀의 콘서트에서 벗어나 다양한 조명, 동영상 등을 활용하는 종합적인 무대 연출을 시도할 계획”이라고 자신감을 드러냈습니다. 이날 공연은 그의 자신감이 모자라지 않은 멋진 무대였다고 사심을 담아 고백해봅니다.

블랙홀은 이날 공연에서 새 앨범에 수록된 신곡 ‘유니버스(Universe)’를 시작으로 ‘더 프레스 디프레스(The Press, Depress)’, ‘이시아이시(E.C.I.C)’, ‘진격의 망령’, ‘꿈속의 나의 집’, ‘바람을 타고’, ‘거지에서 황제까지’ 등 앙코르 포함 20여 곡을 선보였습니다. 이날 공연은 기존의 블랙홀이 보여준 무대와는 차별화된 구성으로 팬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습니다. 클럽에서 흘러나오는 EDM(일렉트로닉 댄스 뮤직)을 방불케 하는 진보적인 전자음향과 반투명 스크린 및 대형 액정을 활용한 다채로운 영상, 그리고 리듬과 함께 호흡하는 화려한 조명까지 기존의 블랙홀 공연에서 볼 수 없었던 물량 공세가 펼쳐져 팬들의 감탄을 자아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소규모의 공연장이나 클럽에서 스탠딩으로 블랙홀의 무대를 지켜봤던 팬들은 해외 유명 록밴드 부럽지 않은 화려한 무대에 아낌없는 환호와 박수로 화답했습니다.

이날 공연을 기획한 윈스토리의 김용복 대표는 “올림픽 체조경기장에 투입되는 물량 이상의 장비가 무대에 투입돼 완성도에 만전을 기했다”며 “이날 공연은 추후 DVD로도 발매될 예정”이라고 전했습니다. 공연에 아쉽게 못 오신 분들은 DVD를 기다리시면 될 듯합니다.

[취재X파일] 팬과 함께 나이들 수 있는 밴드가 있다는 건 행복하다

블랙홀은 본 무대 마지막곡인 ‘그 길은 외롭지 않습니다’를 무대 위로 올린 팬들과 함께 불러 의미를 더했습니다. 이 곡은 블랙홀이 팬들에 대한 고마움을 담은 곡으로 지난해 11월 50여명의 팬들이 함께 코러스 녹음에 직접 참여했습니다. 당시 부산, 고흥 심지어 미국에서도 팬들이 녹음에 참여하겠다고 건너오는 바람에 인원을 나눠서 녹음해야하는 즐거운 소동이 벌어졌었죠. 이들은 블랙홀의 활동이 잠시 뜸했던 2010년에는 십시일반 돈을 모아 단독 공연까지 열어줬던 열성적인 팬들입니다. 좌석에 앉아있던 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무대 앞으로 쏟아져 나와 공연장 분위기를 스탠딩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헤비메탈 공연장에서 아줌마 부대가 오빠를 외치는 모습은 결코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닙니다.

공연이 끝난 후에도 공연장을 벗어나는 팬들은 없었습니다. 공연 직후 마련된 팬 사인회 때문이죠. 9년 만에 새 앨범을 손에 쥔 나이 지긋한 팬들은 멤버들의 사인을 기다리며 서로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이들은 이미 크고 작은 공연장에서 오랜 세월 마주치며 안면을 익힌 ‘전우’들입니다. 멤버들의 사인을 기다리는 팬들의 장사진 속에서 근 20년 전 고향(대전)에서 블랙홀이 공연을 벌일 때마다 ‘야자(야간자습)’을 빼먹고 교문 밖으로 뛰쳐나갔던 기자의 모습이 흐릿하게 비칩니다. 이 땅에 팬들과 함께 나이들 수 있는 밴드가 하나 쯤 존재한다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