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10월 말이면 거리에 전파를 타고 흐르는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라는 노래가 물결을 일듯이 저는 개인적으로 11월이면 차중락의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이라는 노래가 귓전에 맴돕니다. 사연은 필자가 1983년 11월 워커힐 합숙소 뒷뜰에서 그해 12월에서 치러질 MBC 신인왕전 데뷔를 위해 야간에 훈련할 때 어디선가 피아노 선율에 흘러나오는 차중락 씨의 노래가 잊혀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가슴을 촉촉히 적시는 감미로운 맛이 추억과 버무려져 가슴 한 구석에 아직도 소중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노래의 주인공 차중락 씨는 1968년 11월 10일 27세의 젊은 나이에 노래글처럼 낙엽따라 사라져 버렸더군요. 동시대 그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배호 씨도 만 29세에 자신의 히트곡 <마지막 잎새>처럼 떨어지고 말았는데 그 날이 11월 7일이더군요. 슬픈 곡은 슬픈 운명을 낳는 전주곡이기 때문일까요? ‘간다 간다 정든님이 떠나간다’라고 장승곡처럼 슬픈 노래를 부르던 김정호 씨도 33세이던 11월 29일 젊은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이것으로 끝이 났으면 괜찮을텐데 김현식이라는 가수도 히트곡인 <내사랑 내곁에>를 절규하듯이 열창했는데 만 32세 11월 1일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서정적인 가수 최백호 씨의 노랫말처럼 낙엽이 지면 서러움이 더해서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는 것일까요? 황복수와 배형환오늘은 동양 페더급 챔피언이자 WBC 페더급 세계 1위에 오르며 1970년대 한때 이름 석자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황복수(1954년생 영등포)와 그와 7차례나 겨뤄 단 한 차례도 승리하지 못하고 나팔꽃 같은 짧은 권투인생을 마감한 한 복서를 소개할까 합니다. 그리고 그 또래의 복서 몇 명도 추가로 언급하겠습니다. 신상(?)을 먼저 공개해하자면 ‘맞대결 7패’의 복서는 대한민국 원예무역의 대부로 꼽히는 배형환(54년생 김천) 회장입니다. 그는 복싱 은퇴 후 경농 화훼 종묘 회사를 설립해 눈부신 성공신화를 이뤘답니다.
이 두 사람은 1972년 1월부터 1974년 12월까지 만 3년 동안 7차례를 싸웠던 숙명적인 인연을 가졌습니다. 첫 대결 당시 황복수(1971년 프로 데뷔)는 6전 전승에 3KO승이었고, 배형환은 프로 첫 경기였습니다. 일단 최고의 유망주와 거리낌없이 맞대결을 받아들인 배형환의 배짱이 대단합니다. 게다가 둘은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함께 동문수학한 절친이기도 했습니다. 이 두 사람이 7차례나 연속 경기를 할수 밖에 없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두 사람의 관장들이 친분이 두터운 동갑내기 친구였기 때문입니다. 황복수가 운동을 시작한 영등포 필승체육관의 이영원 관장(37년생 작고)과 배형환이 소속된 경흥체육관의 윤창수 관장(경희대 졸업)은 두 선수의 경기가 열릴 때마다 함께 기차를 타고 경기장에 도착했고, 같이 침식을 했으며 치고 받는 살벌한 경기가 끝나면 서로 웃으면서 다시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서울로 상경하는 등 만화 같은 우정을 보였습니다. 승패가 일방적으로 갈린 것은 배형환이 부족했다기보다는 워낙 황복수의 경기력이 출중한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그래도 경기가 잡힐 때마다 단 한번도 거부 의사를 표시하지 않고 당당하게 링에 올라가서 사나이답게 싸웠던 배형환의 용기는 많은 박수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배형환의 성공필자가 아는 복싱인 중에 사업가로 가장 성공한 분은 배형환이라고 단언합니다. 배형환은 1975년 은퇴 후 조그만 채소와 과일을 상징하는 원예농업과 꽃과 풀을 상징하는 화훼농업을 시작해, 밑바닥부터 연구하고 개척하면서 인프라를 체계적으로 확장했습니다. 그 결과 40년이 지난 지금은 원예 화훼 분야에서 대한민국 최고로 우뚝섰습니다. 농림부 장관 대상을 획득한 것이 그 징표입니다. 현재 그는 1년에 반이상을 해외에 출장을 갈 정도로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20년 전에는 ‘대만으로 아침에 출근했다가 저녁에 퇴근을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배형환 씨는 현재 제주도에 야자수 농장이 있고, 경기도 화성과 평택에는 대규모 아로니에 농장을 갖고 있습니다. 절친인 전학수라는 분으로 설명을 들었는데 ‘보는 사람마다 어마어마한 농장 규모에 감탄사를 연발한다’고 합니다. 또한 중국 꽝저우를 비롯해 해외에도 농장들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이런 얘기도 들었네요. 47세에 목동에 있는 100평이 넘는 하이페리온 아파트를 분양 받았는데 마침 층수가 47층이었다고 합니다. 이 집을 방문했던 시골에 사는 황복수는 어마어마한 아파트 규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합니다. 배형환 씨는 술, 담배도 하지 않는 생활 습관과 근검 절약하는 마음가짐으로 유명합니다. 한국어에 중국어 일본어 영어까지 4개국어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고려대 생명환경과학대학원을 졸업한 것도 부족해 중국 상해에서 다시 대학원을 졸업하는 등 끝없는 노력을 병행하는 참된 기업인이다. 요즘은 스페인을 자주 다닌다고 하는데 그곳에서 올리브 나무를 현지에서 사서 제3국으로 재수출하는 무역도 병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제3차 산업인 자동차를 예를 들며 우리가 외국에 자동차를 수출할 때 철강과 기계부품을 수입해야 하는데 농업과 같은 1차산업은 자체적으로 생산, 가공하여 수출하기 때문에 만만히 보면 안 된다고 웃으면서 설명했습니다.이런 화훼 사업은 기본 인프라가 폭 넓게 깔려 있어야 하기에 진입장벽이 높다고 합니다. 웬만해서는 자랑을 하지 않는 배 씨는 “지금 다른 경쟁자가 뛰어들어도 쉽게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자리매김을 해 놨다”고 딱 한 번 자신감을 비췄습니다. 배형환 씨는 우리나라 복서들이 한창 잘 나갈 때 돈관리를 잘못하여 무너진 경우를 종종 본다면서 돈에 대한 자신의 철학도 피력했습니다. “돈이라는 것은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은 사람에게는 차갑고 냉정하게 돌아서는 습성이 있다. 함부로 대하면 반드시 돈은 주인을 외면하기에 항상 따뜻하게 대해주면서 ‘오, 돈아 나에게로 왔구나. 무척이나 감사하고 내가 너를 편안하게 있게 해줄게’하고 답해줘야 한다. 그래야 돈이 따른다. 개인적으로 하루에 1억 원을 번 적도 있지만 이런 겸손하고 차분한 마음가짐은 변함이 없다. 돈은 버는 자랑을 하면 절대 하면 안 되고, 잘 쓰는 자랑을 해야한다.” 정말이지 귀담아 들어야할 조언인 것 같습니다. 화려했던 복서 문명안 황복수, 배형환과 친구인 문명안(54년생 천호상전-한국화장품)이라는 분도 한때 복싱으로 한 획을 그었던 유명한 복서였습니다. 문 씨는 1973년도 당시 서울 한영고 1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찬희가 서울 신인과 전국 신인대회를 연달아 제패하며 겁없이 성장할 때 그해 전국체전 서울선발전에서 따끔하게 성장통인 1패를 선물한 바 있습니다. 당시 박찬희가 링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게 만들었던 복서인 것이죠(박찬희는 이듬해인 74년 테헤란 아시안 게임에서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라이트 플라이급에서 당당하게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그해 제54회 전국체전 본선에서 서울대표로 출전하여 금메달을 획득했고, 연이어 박인규(56년생 남산공전, 전 한국 밴텀급 챔피언)와 함께 아시아 주니어 대표로 선발됐습니다. 또한 55회 전국체전에서도 플라이급으로 출전하여 유옥균(광주)에게 패했지만 값진 은메달을 수확했고, 그 이듬해인 1975년 프로에 데뷔하여 국내 라이트플라이급과 밴텀급 두 체급을 석권했고, 그 유명한 김성준 이강산(현 부천체육관 관장)과 명승부를 펼쳤습니다. 현재 헌법재판소 내에 청원 경찰로 근무하고 있는데 곧 정년퇴직을 한다고 합니다.
한창덕(53년생 중산체육관) 씨는 건국 이래 최초로 출전한 1948 런던올림픽에서 동메달(플라이급)을 딴, 그 유명한 한수안(25년 청원생, 작고) 씨의 아들입니다. 이 분도 1975년 필리핀에서 벌어진 아시아선수권 금메달리스트로 실력이 쟁쟁했습니다. 1979년 킹스컵 대회선발전에서도 결승까지 치고 올라가 전학수(수경사)에게 패했지만 놀라운 감투정신을 발휘해 부전자전의 명성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한창덕 씨는 프로에 데뷔해서 차동수(작고)를 1라운드 KO로 꺾고, 1979년 MBC 신인왕전 최우수선수 출신이었으며 그 후 전 IBF 주니어 라이트급 세계챔피언이었던 유환길(60년생, 작고) 선수에게 치명적인 1패를 안겼던 안현(59년생, 일화봉화 체육관)을 일축할 정도로 눈부신 기량을 선보였습니다. 여기서 잠깐 한창덕의 부친인 한수안 씨의 비화를 소개할까 합니다. 당시 한국의 대표선수들은 여객선과 비행기를 수없이 갈아타면서 20일 만에 런던에 도착했습니다. 한수안 씨는 8강전에서 네덜란드의 코만을 2라운드 KO로 이기고 준결승에 진출했는데, 그 다음날 경기시간이 변경되었는데 이 상황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뒤늦게 상황을 감지한 한수안은 허겁지겁 글러블 낀 채 빵과 주스로 식사를 해결하는 해프닝을 연출하며 부랴부랴 링에 올라가 경기를 치렀다고 합니다. 상대는 이탈리아의 반디 넬라 라는 선수였는데 3라운드까지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2-3으로 판정패하고 말았습니다. 주심이 아르헨티나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이 경기 운영을 편파적인 진행을 하여 경기 후 자격박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왜그랬을까요? 당시 아르헨티나에는 그 유명한 파스칼 페레스(작고, 후에 아르헨티나 최초의 플라이급 세계챔피언)라는 선수가 준결승에 선착해 있었는데 이 주심이 한수안 씨보다는 비교적 만만해 보이는 반디 넬라가 승리하도록 운영의 묘를 발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아르헨티나 페레스 선수는 금메달을 땄습니다. 한수안은 당시 3,4위전을 치러 판정승을 거두고 역도의 김성집씨 동메달에 이어 두 번째 메달 획득에 성공했습니다. 당시에는 3,4위전을 치러야만 동메달을 획득할수 있었습니다.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인 것 같아서 한줄 썼습니다. 한창덕은 부친께서 뿌리를 내린 남대문에서 개인 사업을 하면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성품이 차분하고 인자할 뿐만 아니라 후배들에게도 다정다감하게 잘 대해줘서 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불운의 복서 전학수 전학수(54년생 천호상전-수경사)라는 복서는 한 마디로 불운의 복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름 앞에 그 호칭이 늘 따라다녔죠. 황복수와 함께 영등포에서 함께 자란 죽마고우로 학창시절엔 전교에서 1,2등을 할 정도로 수재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복서 중에서 가장 감성이 풍부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습니다. 독학으로 영어와 일어를 완벽하게 마스터했을 뿐만 아니라 서예와 그림에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난 솜씨를 보여 황복수는 “학수는 권투하면 안 되는 친구”였다고 회고했습니다. 전 씨는 1978년도 세계군인선수권에서, 후에 프로에서 ‘아프리카 대륙의 최고 복서’로 군림한 가나의 아주마 넬슨(46전 39승 28ko 5패 2무)과 명승부를 펼친 것으로 유명합니다. 넬슨은 그 유명한 윌프레드 고메즈를 11회 KO로 제압하는 등 강타자로 페더급과 J.라이트급 두체급을 제패했던 세계챔피언으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전 씨는 준결승에서 넬슨을 상대로 1,2라운드까지 연달아 카운터를 명중시키면서 우세한 득점을 유지하였지만 3라운드에서 공방전을 치루던 중 헤드기어가 돌아가 시야가 가려진 상태에서 주심이 계속 경기를 진행하는 바람에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경기 장소가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였으니 명백히 주심의 태도에 문제가 있었죠. 1979년도 킹스컵 본선에 국가대표로 출전한 전학수는 1회전에서 홈링의 위로조 시와파를 상대로 우세한 경기를 펼쳤지만 경기는 뒤집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날 태국신문 1면에 불공정 판정을 질타하는 기사가 나올만큼 전학수 선수는 억세게 운이 없는 복서였습니다.전 씨는 아마추어 시절에 국가대표 간판 오영세(동양 주니어라이트급 챔피언 역임)를 꺽었던 서인석(동아대)을 비롯하여, 유인봉(경남대)을 꺾었고 또한 박태국(해태) 최진식(부산)이라는 소위 한가닥 한다는 정상급 선수도 제압한 바 있습니다. 그 정도로 테크닉이 좋은 복서였습니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최종 선발전에서 유종만(한국체대 교수)에게 패했지만 주변의 정황으로는 선전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전학수는 아시안게임과(74년도 테헤란 밴텀급 금메달) 아시아선수권 대회(75년도 태국 방콕)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던 유종만에게 네임밸류에 밀려서 패한 듯 했다고 회고한 바 있습니다. 유종만은 경기력도 뛰어나서 당시 대한체육회장이었던 김택수 회장의 후광도 독차지했던 복서였다고 아울러 피력했습니다. 전학수 씨는 은퇴 후 2004년도 직장생활을 하다가 허리를 다쳐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받는 과정에서 척추가 손상되는 의료과실 사고로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는 장애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분은 평소 관심이 있던 회화(미술)에 관심을 갖고 꾸준히 연마하여 2010년 전국 장애인 기능대회에 출전하여 파퀴아오와 호야의 경기 모습을 화폭에 담아내 장애인 국가대표로 선발되기도 했습니다. 황복수 선수는 전학수 선수를 한국의 피카소라고 불렀습니다(황복수의 아들도 홍익대 미대를 나온 미술학도입니다). 전 씨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신이 장애를 주신 대신 그림을 그리면서 행복을 찾도록 만들어주셨다. 현재 통증을 달고 살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겸허하게 살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황복수(54년생 천호상전-인천체대) 얘기입니다. 황복수는 그야말로 70년대 한페이지를 장식했던 독보적인 복서였습니다. 종신전적 53전 42승 15ko승 9패 2무를 기록했고 한때는 WBC 페더급 세계 1위까지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프로데뷔 중반인 수경사 신입시절 휴가를 나와 길거리에서 시비를 거는 불량배에게 한 방을 먹였는데 그만 오른속 정권이 치아에 찍히면서 손등 골수염이라는 치명상을 당했습니다. 이후 오른손이 완치 불능 상태가 되자 왼손 하나로 수많은 강타자들과 글러브를 섞었던 전설적인 복서였습니다. 황씨가 글러브를 섞은 상대 중 가장 강한 이는 첫 원정 경기인 1975년 2월 태국 현지에서 동양 밴텀급 타이틀 매치를 벌인 베니세 보코솔(전 WBC 플라이급 세계챔피언, 57전 49승 36ko 8패)이라는 강타자였습니다. 펀치를 맞을 때마다 둔기로 맞는 것 같은 큰 충격이 왔다고 합니다. 그 다음으로 강한 상대는 대학생 세계 챔피언으로 유명했던 로얄 고바야시(43전 35승 27ko 8패)로 그는 염동균과 글러브를 섞었던 전 WBC 슈퍼밴텀급 챔피언이었는데 1979년 4월 마지막 세 번째 원정 경기의 상대였습니다. 황 씨는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로얄 고바야시의 고향인 아오모리에서 1-2로 판정패한 것이 참으로 안타까웠다고 회고했습니다. 황복수-카라스키야 일전
아무래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경기는 1978년 8월 헥토르 카라스키야(60년생)와의 10라운드 경기죠. 홈경기임에도 불구하고 1-2로 충격의 판정패를 당한 것입니다. 이유를 묻자 황복수 씨는 “당시 모 국내 선수가 외국선수와의 경기에서 억지 판정승을 거두었는데 한국권투 위원회는 황복수-카라스키야 전에 앞서 심판 불신풍조를 일소해야 한다며 세미나를 했는데 그 여파였다”고 회고했습니다. 역 편파판정이 나오자 다혈질인 이영원 관장이 물통을 던지면서 격렬하게 항의했을 뿐만 아니라 6,000여 관중도 고성을 지르면서 난리통을 치기도 했답니다. 어쨌든 한손의 부상을 무릅쓰고도 최선을 다한 황복수 만 애먼 피해자(?)가 되고 말았죠. 그때 파이트 머니를 350만 원 받았는데 당시 그돈이면 서울 변두리에서 왠만한 집한채 살돈이었다고 했습니다. 황복수에게 물었습니다. “카라스키야는 어떤 선수였냐?”고. 황복수의 회고는 이랬습니다. “3라운드까지 가드를 올리고 펀치를 맞아보니 한 마디로 영 아니올시다였지. (홍)수환이형이 맷집이 없었는지 몰라도 보코솔이나 고바야시 펀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력이 없었어. 한 마디로 매스컴에서 너무 부풀린 거품 복서였다고 할 수 있지.”중반부터 황복수는 카라스키야를 향해 양 보디를 때리자 카라스키야는 욱욱 하면서 비명을 질렀는데 이때만큼 오른손을 쓰지 못한 것을 굉장히 아쉽게 생각햇습니다. 당시 카라스키야는 13승 2패의 전적이었고 종신전적은 18승 16ko 5패(3ko패) 1무였습니다. 황복수는 72년 뮌헨 올림픽 플라이급과 밴텀급의 국가대표였던 유종만 고생근 선수등과 글러브를 섞으며 무승부를 기록했지만 이 두 명의 복서는 아마추어에서 오랜 기간을 숙련한 탓인지 프로에 와서는 그다지 매운 맛은 없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지금 황복수는 공주에 있는 천평이 넘는 풍경 좋은 산자락에서 엔학고레가든을 운영하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찾을 정도로 탄탄하게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흔히 세인들은 성공과 실패는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정의하지만 그 결과의 차이는 큽니다. 승자와 패자를 구분하는 가장 큰 잣대는 승자는 실행하고 실천한다는 점입니다. “해보기나 했어?” 생전에 정주영 회장이 즐겨쓰던 말입니다.‘어제는 역사이고 내일은 미스터리이고 오늘은 선물이다.’라는 말은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부인 엘리너 루즈벨트 여사의 말인데 현재인 오늘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로 이해할수 있습니다. 꿈은 행동 하는 자의 것이다.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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