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나 국제갤러리서 ‘Grey & 12’ 개인전
미술교육에서 색상 활용의 중요성은 개인의 창의성을 극대화하고, 개성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렇기에 부모들은 아이가 어느 정도 크면 12색의 크레파스를 쥐어준다. 24색, 36색을 넘어 수채용물감으로 넘어갈 때쯤이면 스스로 색상을 조합해 미술활동을 한다. 그런데 정말 물감을 사용하는 것이 창의적인 작업일까.
경계와 규칙에 천착하는 작가 박미나(40)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품고, 한국에서 유통되는 유화물감 12색 세트를 수집해 그 범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물감을 섞는 것은 창의적 작업이라기보단 규격화된 것들의 조합”이라는 발상에서 시작된 작업이다. 박미나가 미술재료들의 경계를 탐험하는 개인전 ‘Grey & 12’를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개최한다.
“끝이 어딘지 알아야 그것을 깨든지, 지키든지 할 수 있다”는 작가는 자신에게 일종의 수집벽(癖)이 있음을 쿨하게 인정한다. 세면대엔 10개의 비누가 놓여있고, 폼클렌징도 사 모은다. 다 써봐야 무엇이 좋은지 알 수 있으니까. 이번 전시도 이런 스타일이 그대로 반영됐다. 시중에 유통되는 유화물감과 색연필을 회사별로 모은 뒤 분류한 것이다.
‘12 Colors’ 연작에서는 국내에서 유통되는 총 7개 회사에서 생산된 11개의 12색 유화물감을 정방형의 캔버스에 회사별 고유 색채 명칭과 배열된 순서에 따라 나열했다. 수많은 색상들이 다채롭다기보단 한계가 너무 명확하게 드러나, 한 편의 블랙 코미디를 보는 듯하다. 우리의 선택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프레이밍된 색상 속에서만 이뤄지고 있었던 셈이다. 또 한 가지 ‘12색 세트’는 한국에서만 유통된다는 점도 불편한 진실이다. ‘모나미’와 ‘지구 슈퍼 색연필’에서 나오는 12색의 색연필세트를 활용한 드로잉 연작 ‘12 Colors Drawings’와 미국 블릭(Blick)사의 회색 색연필 세트를 활용한 ‘Gray’도 비슷한 맥락이다. 1998년부터 진행된 색칠공부 드로잉 연작 중 신작이다.
새롭게 선보이는 추상작품 ‘Figure’도 인상적이다. 흑ㆍ백ㆍ회색으로 이루어진 추상작품은 작가에게 중요한 22명의 인물에 대한 감정을 초상화로 시각화한 것이다. 굳이 무채색을 택한 이유는 “색이 가진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행위로 인물을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란다. 내년 1월 19일까지.
이한빛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