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디바이스·쇼트폼 플랫폼 영향
‘3분팝’ 옛말, 짧아진 노래 2분대 진입
원곡 빨리감기 ‘스페드 업’ 버전 대세
“매력적인 브릿지·후렴부, 흥행 갈라”
뉴진스 ‘ETA’ 2분 32초, 라이즈 ‘겟 어 기타’ 2분 41초, 전소미 ‘패스트 포워드’ 2분 41초.
K-팝이 갈수록 짧아지고 있다. 속도는 하루가 다르게 빨라진다. 바야흐로 ‘속전속결’의 시대다.
K-팝 ‘히트곡 메이커’인 방탄소년단 프로듀서 피독과 뉴진스 프로듀서 250은 헤럴드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올해 가장 눈에 띄는 트렌드로 “노래 길이가 점점 짧아진다”(피독)와 “점점 빨라진다”(250)는 점을 꼽았다.
사실 두 트렌드는 닮아있다. 노래가 짧아지고 빨라지는 가장 큰 이유는 ‘스마트폰 환경과 콘텐츠 소비 방식의 변화’ 때문이다.
정민재 대중음악평론가는 “아이폰이 처음 등장한 2007년 당시만 해도 스마트폰이 컴퓨터를 대체하진 못했다”며 “현재 5G에 달하는 인터넷 환경으로 모든 콘텐츠 소비가 휴대폰으로 가능해지며 음악, 영화, 드라마 등 콘텐츠 소비 방식이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3분 팝’은 옛말...2분대로 끊어라=실제로 ‘3분 팝’의 시대는 깨졌다. 가요계에 따르면 몇 해 전부터 점차 짧아지고 있던 K-팝은 최근 2분 30~40초대까지 길이가 줄었다.
이제 막 컴백한 아이브가 지난 6일 공개한 선공개된 ‘이더 웨이’의 길이는 2분 47초다. 아이브의 곡 뿐만이 아니다. 현재 활동 중인 대다수 K-팝 그룹의 노래는 꽤나 짧다. ‘짧은 노래’의 최정점에 있는 그룹은 4세대 걸그룹의 선두주자인 있는 뉴진스다.
가장 트렌디한 K-팝을 이끌고 있는 뉴진스가 지난 여름 발매한 두 번째 미니음반 ‘겟 업’에 수록된 여섯 곡은 모두 합쳐봐야 12분 16초 밖에 되지 않는다. 올 여름 최고 히트곡 중 하나인 뉴진스의 ‘슈퍼 샤이’는 2분 35초, ‘쿨 위드 유’는 2분 27초, ‘ASAP’는 2분 15초다. 최근 나온 화사의 솔로 싱글 ‘아이 러브 마이 바디’는 2분 31초, (여자)아이들의 ‘퀸카’는 2분 42초다.
사실 ‘3분 팝’은 오랜 전통이었다. 20세기 대중음악이 도래한 이후 전 세계 팝 시장에서 ‘3분’은 기승전결의 서사 구조를 갖출 수 있는 ‘이상적 길이’였다. 노래가 길면 구조는 더 탄탄해진다. 최저 3분은 구조의 완결성을 유지하는 시간이다.
노래 길이가 짧아지며 나타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구조의 변화’다. 정민재 평론가는 “노래가 3분 이내로 짧아지면, 굉장히 촉박해진다”며 “2분대 노래들은 대체로 구성의 변주가 크다”고 말했다. 곡의 구성이 한정될 수밖에 없어 ‘파격적’인 시도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는 대표적인 사례로 전주를 없애고 코러스부터 등장하거나, 훅이 들어가고 후주를 없애는 경우 등을 들었다.
피독은 “과거엔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쭉 들었지만, 지금은 스킵과 미리 듣기로 곡을 소비하다 보니 노래 자체가 달라진다”며 “청취자들이 후렴까지 노래를 기다려주지 않다 보니 벌스에 이어 코러스 파트가 나오는 게 아니라 인트로부터 듣고 싶은 음악이나 바로 춤을 보여줄 수 있는 구조의 음악이 나오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틱톡, 쇼츠의 영향이 크다”고 덧붙였다. 르세라핌의 ‘언포기븐’은 가까스로 3분대의 길이가 됐으나 이런 형식을 따른다.
▶‘1분 짜리’ 영상에 맞춰...‘점점 더 빠르게’=노래가 짧아지기만 한 것은 아니다. 짧아지는 것도 모자라 점점 빨라진다. ‘소비 방식’의 변화와 함께 창작자들이 ‘짧은 노래’ 트렌드를 불러왔다면, ‘빠른 노래’ 트렌드는 능동적인 청취자들로부터 비롯된 변화다. 이 역시 틱톡과 같은 모바일 쇼트폼 플랫폼의 영향이 크다.
쇼트폼 플랫폼의 사용자들은 올 한 해 자발적으로 유명 팝, K-팝의 ‘스페드 업(Sped up)’ 버전을 만들어 BGM(배경 음악)으로 올리며 새로운 문화와 유행을 불러왔다.
‘스페드 업’은 원곡을 130~150% 가량 배속해 만든 2차 창작물이다. 속도가 빨라진 곡에서 가수의 목소리는 가늘어지고, 가사는 알아듣기 어렵다. 하지만 완전히 색다른 매력과 귀에 착 감기는 중독성, 짧은 길이의 동영상에 최적화 돼 묘한 매력을 안긴다. 250은 “틱톡을 비롯한 쇼트폼 플랫폼의 영향으로 현재 음악계에서 가장 주목할 트렌드는 스페드 업 버전”이라고 했다.
‘빠른 음악’ 트렌드를 주도한 플랫폼은 전 세계 ‘10대들의 놀이터’인 틱톡이다. 틱톡에서 1분 내외 짧은 영상에 배경 음악을 쓰려면 노래는 짧아야 하고, 속도는 빨라야 한다. 사용자들은 엉뚱한 부분에서 툭 끊겨 맥 빠지는 상황에 이르는 것보다, 처음부터 ‘빨리감기’한 음악을 더 선호한다.
정민재 평론가는 “모바일 시대가 되면서 콘텐츠 소비에 있어 집중력이 떨어지다 보니 길고 느린 곡보다는 짧고 빠른 곡에 대한 선호가 높을 수밖에 없다”며 “책은 물론 영화도 1.5배로 돌려 보는 하는 시대가 됐고, 음악은 템포와 호흡이 빠른 곡이 주를 이루게 됐다”고 봤다.
‘스페드 업’ 버전의 인기에 대중음악계도 발 빠르게 움직인다. 미국 싱어송라이터 시저(SZA)는 지난해 12월 발표한 ‘킬 빌’의 ‘빨리감기 버전’이 틱톡에서 인기를 얻자 지난 1월 아예 스페드 업 버전을 선보였다. 내한을 앞둔 영국 팝스타 샘 스미스는 히트곡 ‘아임 낫 디 온리 원’(2014)을, 미국 가수 데미 로바토는 ‘쿨 포 더 서머’(2015)를 지난해 스페드 업 버전으로 다시 내놨다. 다이나믹 듀오는 2014년 나온 ‘AEAO’가 틱톡에서 인기를 얻으며 9년 만에 역주행하자, 스페드 업 버전까지 새로 냈다. 스테이씨, 틴탑 등 K-팝 가수들도 아예 타이틀곡의 스페드 업 버전을 수록한다.
‘짧고 빠른 노래’는 거부할 수 없는 트렌드다. 하지만 느리고 긴 곡이 아예 소외된 것은 아니다. 최근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2’(엠넷)에 나온 다이나믹 듀오의 ‘스모크’는 3분 30초나 된다. 올초 ‘역주행’한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은 5분 1초에 달한다. 올 한 해 K-팝 그룹 역대 최대 판매량을 기록한 세븐틴의 ‘손오공’은 3분 21초였다. 전문가들은 “음악의 양극화가 두드러지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정 평론가는 “짧은 곡이 대세를 이루겠지만, 한편으론 진득하고 기승전결이 확실한 곡이 마니아들의 사랑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며 “지금 음악의 흥행을 가르는 것은 결국 브릿지(후렴과 후렴을 연결하는 파트)의 포인트와 후렴이다. 스마트 디바이스와 쇼트 플랫폼의 영향으로 매력적인 후렴을 살린 곡이어야 짧은 영상에서도 살아남아 인기를 얻는다”고 말했다.
고승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