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최고 아역스타에서 홀연히 종적 감춘 이유
중국서학원, 야탑고깃집, 미얀마선 윤활유 제조업
잘모르는 사업에 피같은 20억 날리고 심근경색
노모 모시며 담양서 스피루리나 상표출원 ‘새출발’
[헤럴드경제(담양)=서인주 기자] 신성일, 문희, 김지미. 60~70년대 국민배우의 아들로 사랑을 독차지한 한 아역배우의 이야기다.
미워도 다시한번, 꼬마신랑이 빅히트 하면서 대한민국 최고 하이틴 스타가 된 한 배우 김정훈은 최정상에서 홀연히 종적을 감췄다.
당시 영화 5편만 찍어도 서울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큰 돈을 벌고 있었지만 미련을 두지 않았다. 모두가 놀랐다. “죽었다, 망했다”는 루머가 쏟아져 나온 이유다.
6일 전남 담양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둥그런 얼굴에 둥그런 안경을 쓴 그는 친근한 형님같은 이미지로 다가왔다. 창문 너머 보이는 영산강이 차분히 흐르듯 그는 커피 한모금 마셔가며 삶의 궤적을 하나씩 그려 냈다.
“4살때부터 연기를 시작했어요. 그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영화를 찍었던 걸로 기억해요. 부모님과 여동생 모두가 고생 많았죠”
남산이 보이는 서울 후암동에서 태어난 김정훈은 삼촌의 소개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첫 영화부터 대박이 났다. 대한민국의 눈물샘을 자극하면서 일약 ‘국민아들’로 떴다. 영화 시나리오가 이어지면서 동시에 10편을 찍기도 했다. 당시 한편당 20만원 정도 출연료를 받았는데 100만원이면 서울에 집한채를 마련할 수 있는 큰돈이었다.
그렇게 10년을 보냈는데 어느날 허탈과 상실감이 몰려왔다. 학창시절을 모두 기계적인 영화작업에만 매달리다 보니 ‘번아웃’이 온 것이다. ‘고교얄개’를 끝으로 모든 걸 내려놨다.
“사람 손 탄다고 하잖아요. 그게 진짜 무섭더라고요. 유명인으로 살다보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지만 시기와 질투 역시 많았습니다. 이대로면 죽을 것 같더군요”
대만으로 떠난 배경이다. 인생2막. 1982년 대만대 사학과에 들어가 학업에 집중했다. 외국 친구들과 사귀며 평범한 대학생으로 지냈다.
“꼬마신랑 아니세요?”
“아니 왜 식당에서 일하고 있어요”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식당서빙과 통역알바에 나섰는데 그를 알아본 팬들이 깜짝 놀라며 안부를 물었다. 고된 유학시절은 그에게 큰 자산으로 남았다. 평범한 일상을 살며 일반인의 삶을 경험했고 대만일주부터 유럽, 남미까지 여행도 즐겼다. 중국어도 원어민 수준으로 익혔다.
1991년.
무작정 중국으로 떠났다. 당시는 중국은 한국과 수교가 이뤄지지 않아 모든 게 낯선 시기였는데 그속에 사업아이템을 발굴했다. 동남아나 중동에서 중국으로 일하러 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중국어와 영어를 가르치는 학원을 연 것이다.
요즘 장안의 화제를 모은 드라마 카지노에서 열연중인 배우 최민식(극중 차무식)의 첫 사업도 영어학원이었다.
“당시 중국은 인건비가 저렴했어요. 북경대를 졸업한 재원들을 강사로 영입해 중국어, 영어를 가르쳤는데 학원비를 꽤 많이 받았어요. 이른바 초대박이 터진 거죠”
첫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4년 가량 학원을 운영하면 많은 돈을 만질 수 있었다.
몇 해 뒤 한국에 돌아왔다. 이번에는 분당에 고깃집을 차렸는데 이게 또 터졌다.
“당시는 생소했던 립 바비큐를 매장 입구에서 구워 냈어요. 유동인구가 많은데다 고기굽는 냄새와 음식 비주얼도 좋아 만석을 이뤘습니다. 3년 가량 운영한 매장은 권리금을 받고 나왔습니다.”
한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은 다른 분야에서도 성공 확률이 높다. 길을 알기 때문이다. 이때 가정도 이뤘다. 그의 30대 중반 이야기다.
또다른 사업에 나섰다. 새집증후군을 없애주는 아이템이다. 결과는 2년만에 폭망.
20억 넘게 손해 봤다. 분당의 아파트와 김포땅도 팔면서 통장의 잔고가 떨어지는 속도만큼 나락으로 떨어졌다.
“지금 생각하면 많이 부족했어요. 젊은 혈기로 답이 보이지 않는 사업을 무모하게 도전했고 결국 큰 손해를 봤어요. 가족들에게 너무 미안했죠”
‘엎친데 덮친격’ 이번에는 건강에 이상 신호가 찾아왔다. 연예인 축구단 ‘일레븐’에서 운동을 하다가 식은땀이 줄줄 나고 어지럼증이 왔다. 드라마 ‘한명회’에 출연했던 배우 이덕화와 최수종씨가 화들짝 놀라며 구급차를 불렀다. 심근경색으로 사선을 넘고 있었던 것이다.
극심한 스트레스가 저승문턱까지 이끌었다. 마침 현장을 지나던 심장내과 전문의가 그를 알아보고 응급처리를 해줬다. 스텐트 시술로 목숨을 건졌고 술과 담배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몸과 마음이 지쳐갈 때 쯤 지인의 소개로 미얀마를 찾았다. 눈망울이 맑은 미얀마 사람들과 정글속에 갇혀있는 원초적 자연환경에 매료됐다. 가족들을 이끌고 무작정 미얀마로 이사했다.
미얀마의 낡은 방송시스템을 교체하는 사업에 투자해 종자돈을 벌었다. 방송일은 그가 잘 알고 있는 분야다 보니 자신감이 붙었다. 내친김에 윤활유 사업을 개척했다. 군부독재가 이어지는 미얀마에서 윤활유 허가를 받기까지 2년 6개월이 걸렸다. 생존을 위해 죽기 살기로 매달리며 현지 관료들을 설득했다. 결국 조인트벤처를 설립해 제조공장을 만들었다.
대학시절부터 인연을 맺은 지인들의 도움으로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동남아 수출물꼬도 열었다.
사업본능은 또 발휘됐다. 2019년 한류열풍을 지켜보며 미얀마에 엔터테인먼트 학원을 차렸고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한 과목에 300달러 하는 강의에 학원생이 몰렸다. 배우경험을 토대로 연기와 보컬, 댄스 등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한류 아이템이다.
멈춤.
4개월만에 코로나 19가 찾아왔다. 모든게 올스톱 되면서 현지 사업도 잠시 멈춰 섰다. 아빠는 한국, 엄마는 미얀마, 아들은 캐나다, 딸은 홍콩. 가족들은 모두 흩어졌다.
그는 현재 서울과 전남 담양을 오가며 새로운 사업을 추진중이다.
오랫동안 관심을 기울이던 스피루리나 건강식품 제조에 공을 들이고 있다. 바이오 전문기업 엔셀(대표 이병국)과 ‘김정훈 스피루리나’ 상표를 출원했다. 전남도, 담양군 등과 협의해 양산시스템을 확충할 예정이다.
“인생 첫 시작은 배우로 출발했지만 이제는 성공한 사업가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지난 삶을 돌아보니 정상에 있다고 다 행복한 게 아니였어요. 내리막이라고 해도 노력하면 언젠가 올라간다는 평범한 진리도 깨닫게 됐고요”
커피가 식어갈 때 인터뷰가 끝이 났다. 영화나 드라마 보다 유쾌했고 재미있는 스토리에 마음이 따뜻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