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홍 피아노 리사이틀
슈만ㆍ스크랴빈ㆍ프랑크로
써내려간 세 편의 연작소설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무대엔 연작소설이 쓰였다. 음표는 활자로 치환돼 서로 다른 이야기로 존재하다, 보이지 않는 고리에 묶였다. 슈만, 스크랴빈, 프랑크. 세 편의 이야기는 한 편 한 편 독립적인 이야기면서도 촘촘히 쌓아올린 커다란 세계 안에 공존했다. 9월의 마지막 목요일 저녁, 서울 마포아트센터에서 열린 박재홍의 피아노 리사이틀에서다.
마포문화재단 ‘M클래식축제’의 일환으로 열린 피아노 리사이틀에선 박재홍이 숙고해 고른 작곡가들의 음악으로 관객과 만났다. 지난해 9월 이탈리아 부소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한 박재홍이 ‘부소니 1주년’을 맞아 여는 리사이틀이라는 점에서 지난 1년 사이 그의 변화를 만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공연은 슈만으로 1부를 시작해 올해로 기념할 만한 해를 맞은 두 명의 작곡가 스크랴빈(탄생 150주년), 프랑크(탄생 200주년)의 이야기를 풀어갔다.
이날의 음악과 작곡가는 각기 달랐지만, 잘 직조된 이야기처럼 서로 연결돼 있었다. 박재홍은 이 공연에 대해 “나름의 굵은 통일된 선을 가져갔다”고 말했다. 박재홍에겐 서로 다른 작곡가의 공통점이 읽혔다. 그는 “슈만과 스크랴빈은 일견 비슷한 면이 있다. 두 작곡가 모두 감정에 너무나 솔직한 사람들이었다”며 “보통 사람들의 관점에선 이렇게까지 깊은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극단을 달리는 작곡가들이었다”고 말했다. “극단과 극단은 서로 통하는 것처럼 트랜스폼할 수 있는 음악”이라는 생각이었다. 프랑크는 “굳이 어떤 표정이나 연기를 트랜스폼할 필요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주면 되는 작품”이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슈만의 ‘아라베스크’로 시작한 연주는 ‘크라이슬레리아나,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으로 이어졌다. 화려하고 다채로운 환상적인 음표들은 선명한 소리가 돼 여덟 개의 이야기로 펼쳐졌다. 박재홍의 피아노는 악장마다 고뇌하는 예술가의 세계로 관객을 이끌었다. 그의 연주는 음악 안에서 자유로웠다. 꼼꼼히 읽어내려간 악보는 박재홍을 거쳐 새로운 세계로 나아갔다. 광기 어린 작곡가의 세계에 완전히 몰입한 피아니스트는 자신만의 색깔을 만드는 연주로 한 단계 도약했다. 아름답고 섬세한 감정들이 흐트러짐 없이 이어졌다. 박재홍은 “슈만은 0.5초라도 집중한 것을 잃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기에 1부가 끝난 뒤 너무나 힘들었다”며 “크레이슬레리아나를 통해 한꺼풀이 벗겨진 느낌”이라고 했다.
환상의 세계에서 헤어나려던 무렵 음표는 다시 고통 속을 거니는 영혼들의 이야기(스크랴빈, 피아노 소나타 3번)를 꺼냈다. 악장마다 분명한 이야기를 가진 이 곡은 박재홍만의 스토리텔링으로 다시 태어났다. 천둥처럼 부서지고 휘몰아치는 터치는 노련했다. 양손의 템포를 능수능란하게 조절하며 혼돈 속의 영혼들을 표현했고, 심연으로 빠져들다 비극적인 결말로 이끌었다. 압권은 4악장의 마지막 1분이었다. 평온하다가도 음울하고, 드라마틱한 여러 감정을 한 데 뭉친 3악장을 이어받은 4악장은 환희로 향해갈듯 장조로 상승하다가 난데 없이 단조로 뚝 떨어진다. 박재홍은 “압도적 희열감과 압도적 절망감이 한 페이지 안에 나오는 곡”이라며 “기껏 끌어올린 감정 해소하지 않고 끝내기에 극명한 온도차를 표현하려 했다”고 말했다.
스크랴빈의 여운과 함께 격정적인 우아함이 파도를 치듯 ‘피아노를 위한 프렐류드, 코랄과 푸가’가 시작됐다. 어지럽게 흩어진 화음으로 시작한 프렐류드의 복잡다단한 음표들은 박재홍의 손에서 폭풍처럼 뿌려졌다. 혼돈의 장을 정리하듯 아름다운 선율과 음색으로 시작한 코랄에선 정확하고 명징한 터치로 이 곡의 중심을 잡았다. 정중앙에 위치해 종교음악의 심오한 이면을 들려주다 푸가에 이르면 그의 연주는 환희로 나아갔다.
박재홍은 모든 순간 야누스가 됐다. 그는 작품마다 여러 자아를 꺼내 서로 다른 이야기를 전했고, 타고난 스토리텔러가 돼 그것을 다시 하나로 엮었다. 그는 알을 깨고 나온 새처럼 자유로웠고, 자기와의 싸움을 이겨낸 승자처럼 용감하고 대범했다.
이날의 연주를 위해 공연 당일 박재홍은 아침 햇살을 맞으며 마지막 연습을 마쳤다고 한다. 스스로의 마음에 채워질 때까지 놓치 않았던 피아노의 감동은 관객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감정의 겹을 층층이 쌓아올린 두 시간은 프랑크와 함께 응축된 에너지를 터뜨렸다. 가장 높은 곳에서 두 번, 그리고 숨죽인 뒤 뚝 떨어져 두 번을 누른 마지막 타건엔 박재홍의 모든 감정이 담겼다. 마침내 마주한 환희의 끝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가장 짙은 여운을 남긴 네 개의 음이었다. 충만한 감정으로 환희를 만끽하자 객석엔 함성과 기립박수가 터져나왔다. 박재홍은 “프랑크를 칠 때쯤 음악이 오롯이 잘 전달되고 있다고 느껴 너무나 행복했다”고 말했다.
서로의 감정을 공유한 뒤 박재홍은 예정된 앙코르보다 한 곡을 더해, 이날의 공연을 마무리했다. 드뷔시의 ‘전주곡 1권 L. 117: 10. 가라앉은 성당’, 포레의 ‘로망스 무언가 3번 내림 가장조 작품번호 17 - 3번’, 드뷔시의 ‘전주곡 1권 L. 117: 8. 아마빛 머리의 소녀’로 끝이 났다. 박재홍은 “앙코르까지 프로그램처럼 짜는 걸 좋아한다”며 “원래 두 곡만 연습했는데 너무나 감사해 프렌치를 하나 더 하고 싶어 드뷔시를 한 곡 더했다”고 말했다. 연습 없이 나온 마지막 곡까지 더하자 객석은 벅찬 감동이 이어졌다. 객석엔 마지막까지 눈물을 닦는 관객들이 적지 않았다. 모든 곡을 마친 뒤엔 아낌없이 기립박수를 보냈다. 박재홍에게도 충만한 시간이었다. 그는 “관객들이 참여해주시는게 느껴져 너무나 행복했다”며 “보통 만족도는 50%만 넘겨도 대성공인데, 이날은 50%를 넘겼다”며 웃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