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그라나도스 연주

8일 예술의전당 독주회

 

40여년간 품은 오랜 꿈

청춘과 황혼이 공존한

피아노로 듣는 오페라

청춘과 황혼의 공존…백건우의 ‘고예스카스’ [고승희의 리와인드]
‘건반 위의 구도자’ 백건우가 지난 8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스페인 작곡가 엔리케 그라나도스의 피아노 모음곡 ‘고예스카스’로 관객과 만났다. [빈체로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40여년의 시간이 음악 사이로 흘렀다. 청년 백건우의 가슴을 뛰게 했던 ‘고예스카스’를 향한 꿈은 긴 길을 걸은 뒤에야 이룰 수 있었다. 오래 품은 마음을 담은 음표들엔 눈부신 청춘과 굽이진 시간의 길이가 공존했다.

‘건반 위의 구도자’ 백건우(76)는 지난 8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최근 발매한 스페인 작곡가 엔리케 그라나도스(1867~1916)의 피아노 모음곡 ‘고예스카스’로 관객과 만났다.

피아니스트로 데뷔한지 66년. 가슴 속에 40여년의 세월 동안 품고 있던 이상을 뒤늦게야 꺼내놓은 ‘고예스카스’에선 백건우의 가장 자유롭고 솔직한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연주회는 쉼 없이, 70분간 하나의 호흡으로 이어졌다.

‘사랑의 속삭임’으로 시작한 고예스카스는 마지막 일곱번째 곡인 ‘지푸라기 인형’까지 건반 위를 춤추듯 거닐 듯 백건우의 연주를 만날 수 있었다. 70분간 이어진 일곱 곡은 “피아노로 듣는 오페라”(백건우)처럼 하나의 이야기로 직조됐다.

청춘과 황혼의 공존…백건우의 ‘고예스카스’ [고승희의 리와인드]
‘건반 위의 구도자’ 백건우. [빈체로 제공]

선명하고 힘 있는 타건 뒤로 영롱함을 품은 유려한 음들이 이어지는 ‘사랑의 속삭임’은 스페인의 전통무용인 요타(Jota) 리듬을 바탕으로 한다. 꾸밈음이 끝없이 이어지는 선율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득하고 아름다운 시절에 대한 그리움처럼 들렸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햇살처럼 백건우의 속삭임은 화사하게 부서졌다.

그의 ‘고예스카스’는 한 곡 한 곡마다 그림이 그려졌다. ‘창가의 대화’가 시작되자 마주 앉은 두 사람이 ‘고요한 대화’ 장면이 떠올랐다. 느린 템포로 시작된 곡 안에서 두 사람은 차분히 대화를 나누다 사랑을 속삭이고, 이내 어그러져 마음을 다치고 마는 수많은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섬세한 표현력이 바탕했기에 가능한 장면이었다. 이어진 세 번째 곡 ‘등불 옆의 판당고’에선 반복적인 리듬이 귀를 사로잡으며 풍성한 음악적 색채를 만날 수 있었다.

청춘과 황혼의 공존…백건우의 ‘고예스카스’ [고승희의 리와인드]
‘건반 위의 구도자’ 백건우가 지난 8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스페인 작곡가 엔리케 그라나도스의 피아노 모음곡 ‘고예스카스’로 관객과 만났다. [빈체로 제공]

네 번째 곡인 ‘비탄 또는 처녀, 그리고 나이팅게일’에 이르면 극적인 감정들이 밀려왔다. 서정성이 극대화된 이 곡 안엔 ‘처연한 슬픔’이 채워졌다. ‘비탄 또는 처녀, 그리고 나이팅게일’은 고예스카스 모음곡 중 따로 떼어 연주될 만큼 가장 잘 알려진 곡이다. 백건우의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곡조는 깊은 슬픔이 아름답게 그려졌다. 다섯 번째 곡인 ‘사랑과 죽음’은 네 번째 곡을 이어받아 극적인 표현들이 더 커졌다. 극과 극을 달리는 표현들이 비극적으로 이어졌다. 기나긴 고통 속에서 마주하는 선명하고 시린 높은 음표와 비수에 찬 낮은 음표가 대비를 이루며 관객의 가슴으로 가닿았다.

‘에필로그 : 유령의 세레나데’에 이르면 ‘창가의 대화’에서 들었던 리듬이 다시 나온다. ‘고예스카스’는 ‘기타 소리를 듣는 것 같은 피아노곡’이라는 특징도 가지고 있다. 백건우의 여섯 번째 곡은 마치 물 위를 첨벙첨벙 뛰어다니는 것처럼 풍성하면서도 경쾌한 타건이 들려왔다. 이어 흥겹고 화려하게 시작하는 마지막 곡 ‘지푸라기 인형’에 다다르면 한 편의 드라마를 본 듯한 감동이 밀려온다.

청춘과 황혼의 공존…백건우의 ‘고예스카스’ [고승희의 리와인드]
스페인 작곡가 엔리케 그라나도스의 피아노 모음곡 ‘고예스카스’를 연주한 독주회 이후 이어진 팬사인회. [빈체로 제공]

지치지 않는 에너지와 흐트러지지 않는 집중력으로 이어진 ‘고예스카스’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70분의 긴 호흡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시계는 순식간에 태엽을 감았다. 백건우의 ‘고예스카스’ 안엔 반짝이는 청년과 삶의 희노애락을 모두 지나온 찬란한 황혼이 공존했다. 음악 안에서 그는 자유로웠다. 그라나도스는 한국에선 다소 생소한 작곡가이지만, 이날의 연주는 낯선 음악과 사랑에 빠지게 해준 시간이었다. 백건우는 ‘고예스카스’를 통해 그의 음악여정에 또 다른 이정표를 세웠다.

모든 감정을 터뜨린 연주를 마치고 그는 흠뻑 젖은 백발의 머리를 두 손으로 쓸어올리며 땀을 닦아냈다. 객석은 떠나갈 듯한 환호와 기립박수로 거장 피아니스트에게 존경을 전했다. 백건우는 몇 번이나 다시 무대로 나와 객석 구석구석을 응시하며 인사를 건넸고,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벅찬 심경을 전했다. 무대 위엔 짙은 여운과 백건우의 소년 같은 미소가 길게 남았다.

청춘과 황혼의 공존…백건우의 ‘고예스카스’ [고승희의 리와인드]
백건우의 독주회를 찾은 한 관객은 그의 데뷔 음반 LP를 들고와 사인을 받았다.

연주회가 끝나고 이어진 사인회엔 관객들의 긴 줄이 그칠 줄을 몰랐다. 이날 사인회에는 백건우의 데뷔 음반 LP를 들고 온 관객도 있었다. 모리스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를 연주한 음반이었다. 김재환(57) 씨는 “선생님의 오랜 팬이라 경매 사이트에 나온 음반을 구해 가져오게 됐다”며 “이 음반을 보시고 깜짝 놀라시며 음반 표지의 그림도 직접 고른 거라며 반가워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라나도스는 한국에선 많이 연주되지 않는데 선생님의 연주는 그라나도스의 음향과 색채, 울림이 무척이나 잘 살아나 깊은 울림이 있었다”는 소감을 들려줬다.